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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아트] [소설] 사필귀정 [20]

  • 갬블러
  • 2019.11.20 15:17 (UTC+0)
  • 조회수 1388

어떤 순간에도 결코 변하지 않는 것. 운명.

그것은 언제나 사람을 통제하고 제 입맛대로 흔들어댄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황제도 운명의 숨결 한 번에 백골이 되어 세상 어딘가로 흩어져버렸고, 평생 동냥과 함께 해온 거지는 지고하신 주상 전하의 머리 위에 올라선 실세가 되었다. 나라가 미쳐 돌아가는 것이 아닌, 운명이 미쳐버린 것이다.

그 운명에 순응하는 법이었던 걸까? 나는 내 삶을 원망하지 않는 법을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알게 되었다. 나는 나기를 나약하게 난지라 평생 형의 발목을 잡아왔다. 감히 예상컨대 부모라는 작자들도 이런 나를 보고 내다버린 것임이 분명하다. 꼴에 자식이라고 굶어죽게 둘 수 없으니 핏덩이 같은 형제를 세상에 방치한 채, 홀연히 사라진 것이리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의원도 손을 뗄 정도로 역한 병이 아니던가. 들려오는 소문에 따르면 나와 비슷한 병을 가진 계집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장안의 내로라하는 집안이었음에도 그 병을 고치는데 기둥 뿌리를 통째로 뽑았다느니 어쩌니 하는 소문이 돌았다.

그렇기에 나는 언제나 형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살아왔다. 나를 버리지 않았다고, 없는 형편에 계속 의원을 불러 살펴주었다고. 밤이고 낮이고 내 수발을 드느라 자신을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고. 종종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마음 한 켠이 저릿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나의 형은 달콤하기는 하였으나, 머금을 수 없는 독과도 같았다. 그 지나친 다정함을 견뎌내다보면 우리는 서로의 그림자에 잡아먹혀, 자신을 잃게 되리라는 것을 은연 중에 알았다. 그리 될 것이 두려웠다.

우리는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에 살았다. 돌지도 않는 식욕에, 말라 비틀어진 입술 새로 미음을 입에 밀어넣어야 했다. 입에 들어간 액체가 언제나 역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악질을 하기 일쑤였다. 그럼 또 뒷정리는 형의 몫이다. 무언가를 하려고 해도 이런 몸으로는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달은 건, 언제부터였을까.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서월아, 괜찮아. 무엇이 그리 괜찮다는 것인지는 모르오나 형은 내게 늘 그리 말했다.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내 이름. 어느 고을에 어떤 병자가 있는데, 그 형이 참 고생이라더라. 이름이 하랑이라던가. 그리 밖에 알려지지 않은 내 존재가 형으로 인해 살아있음을 확인받는 감각은, 이질적이면서도 죄스러웠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형이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 그리 달갑지 아니하였다. 그에게 기생하고 있음을 재차 확인받는 기분이었으니까.

우리는 같은 시간 속에서, 같은 곳에 있었으나 바라보는 것이 달랐다. 형은 오직 나의 완치를 바라보았으나 나는 내심 그가 내게서 벗어나기를 바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아무렇지 않게 나간다 하고,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 적도 몇 번 있었다. 이렇게 홀로 앓다 가버리면 맘씨 좋은 마을의 누군가는 내 장례를 치루어주겠지. 형이 노력한 것을 알기에 누구도 쉬이 욕할 수는 없겠지. 하나 그 희망같잖은 희망이 부서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월아. 형 왔어. 늦었지? 미안해, 옆집 김씨 형이 떡 주셨는데, 너 먹을래?"

너나 먹어라. 지금 누구 놀리냐. 퉁명스레 말해보고 싶었다. 이렇게 모질게 말하면 정이 떨어졌을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토해내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했다. 형이 상처받지는 않을까. 세상에서 제일 착한 우리 형. 곱게 가지는 못할지언정 상처를 줘도 되는 걸까. 언제나 대답을 하려 하면, 그런 목소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렇기에 행하지 못하였다.

"괜찮아. 오늘 속이 별로 안 좋아서, 내일 먹을게."

내일은 없었다. 내일은 오늘이 되고, 그 오늘의 내일은 또 오늘이 된다. 내게 내일이란 다신 오지 않을 미래다. 고통과 우울, 무기력함에 점철된 삶에 미래가 어디 있겠는가. 형은 그를 알고 있었을까? 어찌 되었건, 맥락은 이해한 것인지 어느새 그 표현은 완곡한 거절의 말이 되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가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이 늦은 밤이 되어서야 내게 찾아왔다. 하루종일 집에 있었던 것 같은데. 무얼 그리 열심히 하였을까. 호기심이 슬 피어날 무렵에 형은 내게 종이를 보여주었다.

"월아, 이거 한 번 보거라. 형이 서역에서 유행한다는 서신 하나를 배워왔는데. 이게 그거란다. 그, 무당이 굿할 때 쓰는 부적마냥, 누구한테 읽어주면~ 팍! 하고 뭔가 신비한 힘이 그 일을 이루어준다는 거."

형이 베시시 웃었다. 미신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잠시나마 그가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는 그 사실이 중요하였으니까. 나는 글을 배우지 못하였으나 형은 머리가 워낙 좋았던 탓에, 어깨너머로 익힌 것이 많았다. 내 눈엔 제법 수려하게 쓰인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하…. 응, 읽어줘. 형 글 오랜만에 본다."

몇 주만에 목소리를 내어보는 것인지 모르겠다. 다 기어들어가는 송장의 목소리. 형은 그 말 같잖은 말을 어찌나 잘 이해하던지, 곧바로 자세를 고쳐잡고 또박또박 읽기 시작했다.

"이 글은 느, 레... 싼쓰! 불란서에서 시작되어 매 해마다 세상 이곳저곳을 떠도는 신묘한 글이올시다. 이 편지를 타인에게 읽어주는 순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병이 낫고, 집안에는 재물이 들어오며, 가택신의 힘이 강해져 무병장수 한다고 합디다려. 헌데, 만일 나흘 안으로 읽어주지 아니하면 엄청난 재앙이 닥친다고 하니, 꼭! 나흘 안으로 읽으시게나. 모 월 모 일. 김 화백 씀!"

탁. 종이를 벽에 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부적이라도 되나보다. 곧 형은 미음을 내어주었고, 그날따라 토악질이 나오지 않아 서로 곤란하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몇 년만이었는지 모르겠다. 곪아버린 몸의 천을 갈고, 간만에 편히 잠들 수 있었다. 형이 얼핏 제 부적 덕을 보았다는 생각을 하였을까? 뭐든 좋았다. 그가 행복하길 바랐다.

*

새벽. 동화나라는 주변 국가에 비하여 해가 이르게 떠오르는 편이었다. 이른 새벽이야말로 차사가 진정으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순간이다.

하랑은 최근 자신의 거처에 우편함을 세워두었다. 워낙 바빠 얼굴 보기 어렵다는 주자들의 의견을 나름 반영한 것이었다. 대부분은 사소한 이야기였고, 요즘은 세상이 좋아 고철덩이로도 연락이 되었으나 그는 새로운 문물과 영 맞지 않는 눈치였다.

"어디보자…. 호. 뭐가 이리 많은게야. 어이구?"

이 편지는 데빌시티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일년에 한 바퀴 돌면서 받는 사람에게 행운을 주었고 지금은 당신에게로 옮겨진 이 편지는 4일 안에 당신 곁을 떠나야 합니다. 이 편지를 포함해서 7통을 행운이 필요한 사람에게 보내 주셔야 합니다. 복사를 해도 좋습니다. 혹 미신이라 하실지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엔젤시티에서 DKSNQLTMWKD이라는 사람은 1930년에 이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비서에게 복사해서 보내라고 했습니다. 며칠 뒤에 신을 직접 만나 은총을 받았습니다. 동화나라의 앙리 2세는 이 편지를 받았지만 그냥 버렸습니다. 결국 9일 후 그는 실종되었습니다. 기억해 주세요. 이 편지를 보내면 7년의 행운이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3년의 불행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버리거나 낙서를 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7통입니다.

"이런 게 아직도 있단 말이냐? 쯧쯔, 그때가 언젠데. 어디. 그래. 간만에…."

하랑은 눈을 꿈뻑인다. 눈에 띄지 않는 흉처럼 잊고 살았던 기억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동생, 운명에 벗어나려 했던 자신. 그리고 부적이라 써두었던 편지. 모든 것이 부적 덕이라며, 그 종이 한 장을 그리 애지중지하던 모습이 이제야 우습게 느껴졌다. 차라리 늘 그랬듯 최선을 다해 보살피기나 할 걸. 하늘로 돌아가거든 함께 가기나 할 걸. 그런 의미없는 후회를 곱씹은 후, 하랑은 다시 명부를 펼쳤다.

"어디 보자, 오늘은~ 어이구? 이씨 성을 가진 서월이가 가는구먼. 고 녀석, 아픈 몸 이끌고 참 착하게 살았는데. 쯧쯔. 사람 일 모를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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