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有] 게임 속 미소녀가 내게 실존주의를 물었다 │ <당신과 나의 존재불명> 리뷰 [1K]
“그럼 계속 이러고 있자구.
서로가 죽을 때까지
눈을 맞추고 있는 거야.
그래서 당신은
내가 실존한다고 생각해?”
게임을 하다가 이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으신가요?
일단 저는 없습니다.
처음 보네...
보통 비주얼 노벨 속 캐릭터는,
플레이어인 제가 호감을 사거나 사건을 해결하여
스토리를 진행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 게임의 주인공은 사뭇 다릅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고,
저에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달라는 듯이 요구합니다.
뭔가 소위 멘헤라 같아 쎄합니다.
평소의 저라면?
저는 쎄한 인간 탐지기라서 떼어내는 게 정상일 겁니다.
그런데 너무 예뻐서 저도 모르게 따라가게 되네요.
역시 얼굴이 개연성입니다.
그런데 웃긴 건 이 게임이
이렇게 예쁜 릴리스랑 꽁냥거리기만 하는
비주얼 노벨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녀와 케이크를 함께 만들고,
그녀가 만든 RPG 세계를 여행하고,
놀이공원에서의 첫 데이트를 하고,
갑자기 병원놀이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존재와 자아를 되새김질하게 됩니다.
그렇게 게임 속 미소녀가
제게 실존주의를 꾸준히 물어봅니다.
이쯤되면 제가 얘랑 연애를 하는 건지
실존주의 강의를 청강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뭐지?
둘 다 인가?
사실 릴리스가 던지는 질문은
곧 실존주의를 떠오르게 합니다.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이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라고 믿었습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건
곧 우리는 스스로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있다는 것과 같고
그건 그 누구도 해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라고 하면 지루하고 현학적이니까,
그냥 내 삶은 내가 선택한다만 기억하도록 합시다.
그런 점에서 릴리스라는 캐릭터와
이 게임 자체는 정말 특이합니다.
앞서 언급했듯,
게임 속 등장인물은 그저
개발자들이 설계한 시스템과
부여한 역할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릴리스는 메타 발언*을 서슴치 않으며
*메타 발언: ‘메타픽션적인 발언’의 줄임말로
창작물 속 등장인물이 자신이 가상의 세계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거나
작가 및 독자 등 제3의 존재를 향해 던지는 발언
때로는 게임 밖 화면으로 넘나들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존재와 자아에 대한 질문을
자꾸 저한테 맡깁니다.
왜 그런 걸 묻지?
나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어쩌면 릴리스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었던 게 아닌 것 같습니다.
플레이어인 저에게
무엇을 진짜라고 믿고 있는 건지
묻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의 집에서 3km 정도 밖에
철수라는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해 보자.
당신은 당연히 철수와 만난 적도 없고,
앞으로도 평생 만날 일이 없겠지.
그렇게 평생 얼굴조차
마주칠 일이 없을 한 명의 사람과,
당신과 무수한 이야기를 쌓아왔던 나.
당신에게 있어,
더욱 현실적인 존재는 누구라고 생각해?”
과연 릴리스는 실존하는 인물 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그녀는 그냥 게임 속 미소녀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녀와 케이크도 만들었고
RPG 세계에서 모험도 했고
놀이공원에서 데이트도 했고
그녀의 말도 다 들어줬는데요????????????
자 이제 뭐가 현실이지?
저는 그냥 릴리스가 있는 쪽을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예쁘잖아.
아무튼,
릴리스가 제게 던지는 질문과
그 끝을 알 것 같은 게임의 결말 사이에서
저는 흔들리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런 갈등이
오히려 제가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현실이라고 믿는지
돌아보게 만듭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한 일을 기억해?
딸기 케이크를 만들며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관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지.
지금 당신은 자신을 되돌아본 거야.
세상은 나 자신의 내면에 담겨 있으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지로
이 세상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다는 거지.
상식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야.
여차하면 무시해버릴 수 있는 관념일 뿐이라고.”
릴리스는 게임 캐릭터고
그녀가 있는 곳은 게임일 뿐입니다.
그리고 제가 있는 곳은 현실 세계입니다.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순간만큼은
그 경계를 넘나듭니다.
진심으로 릴리스를 걱정하고
그녀의 말에 공감도 해주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보낸 시간과
그때 당시 느꼈던 감정은 모두 가짜였을까요?
“이제 마지막 이야기로 넘어갈 차례야.
마지막 이야기는 영점으로의 회귀라구.
당신과 릴리스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미루어 왔던 질문을.
릴리스는, 존재하고 있는 걸까?”
릴리스는 게임이 진행되는 내내
제게 자아란, 타인이란, 관계란,
그리고 사회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결국은 가장 처음에 질문했던
“그래서 당신은 내가 실존한다고 생각해?”
로 돌아옵니다.
그녀는 객관적인 답을 딱히 주지 않습니다.
대신 저에게 선택을 맡깁니다.
내 삶은 내가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릴리스와 저의 관계를 어떻게 하느냐를
선택하는 순간이 기어코 오고야 맙니다.
“그와 함께 내 의식은 날아갔다.
이제부터 잔인하고, 피로 얼룩진.
미지의 내일로 발을 내딛을 것이다.”
저는 1회차 플레이에서
릴리스의 소멸을 선택했습니다.
놀이공원 씬에서조차 저는
이 세상에 악의로 가득 차 있고
무언가에 기대하면 반드시
실망이 뒤따른다는 선택지를 골랐습니다.
솔직히 소멸을 선택한 이후에도
저는 세상을 여전히 그런 곳으로 여깁니다.
그 선택지를 고른 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고
불완전해 보이는 세상으로 돌아가게 될지라도
저의 자유 의지를 믿고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릴리스의 세계가 진짜일지
제가 있는 이 곳이 진짜일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정답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어떤 세계가 진짜인지를 밝혀내는 게 아니라,
제가 어느 세계를 현실로
받아들이느냐인 것 같습니다.
세상이란 건 제 안에 담겨 있는 것,
즉 저의 의지로 이 세상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럼 저는 지금 스토브크루 3기의 일원으로서
리뷰를 적고 있는 이 세상을
현실 세계라고 정의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게임 평가 요약:
일회성으로 끝나는 게임이 아닙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릴리스와의 '영점으로의 회귀'를
즐겨보시는 건 어떠신가요?
예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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