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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뱅이 형사의 네오 누아르, '디스코 엘리시움'

 

[연재] 김승주의 방구석 게임 (6) 



웹진의 만점 세례, '단점이 없다!'라는 리뷰, 세계 최고 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19년 최고의 비디오 게임'이라는 평가까지. 수많은 극찬을 받은 <디스코 엘리시움>의 한국어화가 완료되었다. 발매일로부터는 8개월, 번역을 시작한 지는 약 5개월 만이다. 

 

90만 자에 이르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여러 게이머들의 참여 덕에 번역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깔끔하게 완료되었다. 드디어 한국 게이머들도 서양권에서 '세기의 명작' 취급받는 게임을 한글로 즐길 수 있게 됐다. 

 

오늘 '방구석 게임'은 <디스코 엘리시움>을 리뷰한다. /편집= 디스이즈게임 김재석 기자



 





# 이 게임, 꽤 치밀합니다.

 

깨질 듯한 숙취 속에서 깨어나 보니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 방은 엉망진창. 잡을 수 있는 물건은 전부 다 부서져 있다. 주변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주섬주섬 입고, 유리창을 깨고 발코니로 날아간 신발을 다시 주워 신는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니 한 여성이 주인공을 "형사님"이라 부르며 인사한다. 계단을 내려가 정문으로 가니 '킴 카츠라기'라는 동양인 형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내 이름조차도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텅 비어버린 기억 속에서 살인 사건의 진범을 잡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내야 한다. <디스코 엘리시움>의 스토리는 대략 이렇다.

 


일어나 보니 주위는 개판이고, 기억나는 거라곤 하나도 없다. 심지어 이름마저도! 


게임 끝까지 함께할 동료 '킴 키츠라기' 형사. 



기본적으로 게임은 RPG의 특성을 띠고 있다. 탑 뷰 형식을 통해 플레이어 캐릭터를 조작하고, 도시를 돌아다니며 퀘스트를 완료한다. 기본적인 플레이 방식은 <필라스 오브 이터니티>나 <발더스 게이트>, 혹은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와 같은 게임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살인사건의 범인을 쫓는다는 점에선 <역전재판>같은 '추리 게임'이 생각나기도 한다. 사람들과 대화하며 능력치 체크를 통과하고, 여러 물체를 클릭해 단서를 얻는다는 점에서 보면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 게임으로 볼 수도 있다.



도시를 돌아다니며 사건을 수사하자. 


사건을 수사한다는 점에선 '추리물' 느낌이 나기도. 


클릭할 수 있는 물체는 모조리 누르며 아이템과 돈을 모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발더스 게이트>와 같은 RPG 게임이 생각난다. 



차별점도 있다. <디스코 엘리시움>에는 전투가 없다. 게임은 대부분 등장인물과의 '대화'를 통해 진행된다. 다소 뻔할 수 있는 구성이지만 <디스코 엘리시움>에는 여기에 한 가지 요소를 더했다. 바로 '능력치와 스킬'이다. 능력치와 스킬. 이는 겉으로 보면 <폴아웃>과 같은 RPG에서 봤던 요소와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디스코 엘리시움>의 시스템은 정말 독특하다.


스킬은 '지식', '감성', '신체', '운동'의 네 가지로 나뉜다. 지식은 말 그대로 '지적 능력'이다. 지식이 높으면 사건 현장을 재구성해 단서를 찾아낼 수 있으며, 논리력을 통해 여러 사건의 인과관계를 좇을 수 있다. '감성'은 심리적 능력이다. 감성에는 상대방의 마음이나 생각을 쉽게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신체'에는 고통을 견뎌내거나 무거운 물건을 쉽게 들 수 있는 기술이 모여 있다. 마지막으로 '운동'은 몸을 활용하는 능력이다. 여기에는 반응 속도나 기계 조작력과 같은 기술이 모여 있다.


그리고 각 능력치에는 하위 스킬들이 있다. 흥미롭게도 이 하위 스킬들은 하나의 '인격'이 되어 주인공에게 말을 걸어온다. 디즈니의 <인사이드 아웃> 속 감정 캐릭터들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각 스킬은 수많은 다중 인격처럼 나뉘어 게임 플레이 내내 주인공에게 끝없는 참견과 조언을 보낸다. 때로는 주인공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며, 자신들의 생각을 늘어놓으며 플레이어의 관점에 대해 묻기도 한다. 플레이어는 이들과 소통하며 게임을 진행한다. 



이 모든 스킬이 하나의 인격체를 구성해 말을 걸어온다고 보면 된다. 
물론 귀엽고 순진한 '인사이드 아웃'의 감정들과는 다르게, 이 녀석들은 삶에 제대로 찌들어 있다. 
욕설은 기본이고 주인공을 대놓고 조롱할 때도 있다. 



아마 글로만 보면 이해가 안 갈 법도 한데, 예를 들자면 이런 방식이다(게임에 등장한 텍스트가 아니라 필자가 즉흥적으로 상상한 대화다). 



"당신은 길을 걸어가다 땅바닥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본다. 흡연자가 몇 모금 피우고 버린 탓인지, 당신은 문득 담배를 주워 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기화학: 아하! 타르와 니코틴의 혼합 물체로군! 안 그래도 몸에 니코틴이 부족했던 참인데 *당장* 주워서 피자고!

 

인지: 냄새를 맡아 보니 아직 버려진 지 얼마 안 된 듯해. 담배를 버린 사람은 아마 멀리 가지 못했을 거야.

 

논리: 남이 버린 꽁초를 다시 주워 피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듯합니다. 사람들이 꽁초나 주워 피는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각 인격은 주인공의 선택에 도움을 줄 때도 있고,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을 때도 있다.
그래도 중요할 때는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 준다.



썰렁한(?) 개그를 칠 때도 있다. 



물론 모든 인격들이 사사건건 간섭해 오는 것은 아니다. 플레이어가 주로 선택한 기술들이 주로 말을 걸어온다. 이 독특한 시스템 덕분에 자신이 추구하는 콘셉트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대화문과 알아낼 수 있는 정보, 그리고 사건 해결의 방향성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여기에 '생각 캐비닛'이라는 시스템이 덧붙여진다. 플레이어는 등장인물과 대화하거나, 특성 선택지나 행동을 통해 '생각거리'를 얻을 수 있다. 이런 생각거리는 플레이어의 머릿속에 집어넣어 '내면화' 할 수 있다. 내면화까지는 시간이 걸리며, 내면화가 이루어지는 동안 페널티를 주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3개 이상의 생각을 내면화하려면 스킬 포인트를 투자해야 한다. 능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잊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내면화된 생각을 잊기 위해서는 스킬 포인트가 필요하며, 한번 버린 생각은 다시 떠올릴 수 없기에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생각 캐비닛 



당연히 생각 캐비닛도 대화의 방향성과 선택지에 영향을 미친다. 가령 '마조프주의 사회 경제학'이라는 생각 캐비닛은 좌익을 긍정하는 선택지를 계속해서 선택하다 보면 '수사학' 스킬이 당신에게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고, 이를 긍정하면 획득할 수 있다.


 마조프주의 사회 경제학을 내면화하면 주인공은 '공산주의자'가 된다. 공산주의를 내면화한 주인공은 '권위'와 '시각화 분석'에 -1 페널티를 받지만, 좌익을 긍정하는 선택지를 고를 때마다 경험치 보너스를 얻을 수 있으며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등장인물과 유쾌하게 대화를 풀어나갈 수 있다.


그렇기에 <디스코 엘리시움>은 독특하다. 특정 컨셉을 가진 캐릭터를 육성한다면 걸맞는 행동이 '특정 선택지'에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를 구성해 게임 내내 주인공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각 캐비닛을 통해 게임을 진행하면서 특정 사상을 깨우치고, 그 사상을 받아들임으로써 보상을 받을 수도 있다. 


주인공의 행동을 보고 인격들이 생각거리를 주기도 한다. 



능력치와 스킬을 통해 통과할 수 있는 '스킬 체크' 시스템도 참 재미있다. 일단 <디스코 엘리시움>에는 "논리적으로 상대방을 설득한다 (논리 능력치가 낮아 선택할 수 없음)"와 같은 선택지가 없다. 플레이어의 능력치가 부족하면 특정 스킬 체크 자체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자신이 주로 육성한 스킬과 관련한 선택지만 등장하기에 '몸도 머리도 완벽한 천재 형사'같은 캐릭터는 연기할 수 없다. 힘과 운동에 주로 투자했다면 근력으로, 지성과 감성에 주로 투자했다면 말빨 위주로 스킬 체크를 통과해야 한다.


게다가 스킬 체크의 성공이 무조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며, 실패가 꼭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다. 스킬 체크를 통과했는데도 상대방이 "당신 말이 너무나 화려해서 믿을 수 없어"라고 하는 경우도 있고, 실패하더라도 "불쌍하다"는 반응을 보여 긍정적인 결과를 도출할 수도 있다. "사실 별 상관은 없어"라며 두루뭉술 넘어갈 때도 있다.


또 선택지는 백색·적색 판정으로 나뉜다. 백색 판정은 실패하더라도 관련 능력치를 올리거나,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선택지다. 예를 들어 논리력이 부족해서 한 용의자가 숨기고 있는 사실을 밝혀내지 못했을지라도 백색 판정을 가진 대화문이라면 나중에 능력치를 올려 다시 도전할 수 있다.


적색 판정은 조금 더 중요한 선택지다. 스토리의 핵심을 좌우하거나, 시간상으론 찰나의 순간에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주먹을 날리고 있는데 "조금 있다가 와서 다시 시도할게요"라곤 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특정 행동이나 대화를 통해 가산점이나 감산점을 얻을 수 있다. 사람을 추궁할 때 거짓말을 간파해 몰아붙인다면 '상대방이 당황하고 있음+1'이 붙는 방식이다. 꼭 대화가 아니더라도 사소한 것에서 가산점을 얻을 수 있기도 하다.


커다란 냉장고의 잠금장치를 열 때 장갑을 끼고 있다면 '장갑을 끼고 있음 +1'이 붙기도 하며, 한 번 실패하고 카츠라기 형사에게 수건을 받아 손을 닦으면 '손이 건조함 +1'과 같은 보너스를 받기도 한다. 반대로 사람들을 설득할 때 핀트를 잘못 잡았거나, 불쾌한 질문을 한다면 "상대방이 분노함 -2" 같은 페널티를 받기도 한다. 



의외의 부분에서 가산점을 받을 수 있다. 


여러 가산점을 모아 판정을 통과할 때는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질 정도. 



예를 들어서 필자는 시적으로 말하기를 좋아하는 한 화물 노동자를 만났다. 노동자와 대화하던 주인공은 '화려한 시를 즉석에서 읇어서 내 감수성을 증명해야지'라고 생각했다. 확률도 50% 정도였고 감정 능력치도 부족하지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선택지를 눌렀지만, 결과는 꽝이였다.

 

주인공은 걸걸한 육두문자의 집합체를 '시'랍시고 내뱉기 시작했고, '논리' 인격은 "아니 진짜로 그게 시라고 생각해요?"라며 주인공에게 일침을 날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노동자는 "꽤 느낌이 있었다."라며 주인공을 두둔했고 관계는 친밀해졌다.


덕분에 <디스코 엘리시움>도 결국 짜여진 이야기를 따라가는 선형적인 게임이지만 이런 치밀한 요소들 덕분에 선형성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적다. 하나의 결과를 좇더라도, 결과까지 도달하는 길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실패'를 꼭 나쁜 것으로만 보진 않기에, 플레이어는 자연스럽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에 맞추어 게임을 진행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주인공은 능력치 외에도 '체력'과 '사기'를 가지고 있다. 담배를 피우거나, 신체 특성이 요구되는 판정을 실패해 다칠 경우에는 체력이 감소한다. 상대방에게 추한 모습을 보여 자존심이 꺾이거나 치부를 들키면 사기가 감소한다. 체력이 전부 떨어질 경우에는 심장 마비, 사기가 전부 떨어지면 보다 못한 주인공이 형사를 때려치우며 게임 오버 화면을 보게 된다.


체력과 사기는 아이템을 통해 회복할 수 있는데, 맵 구석구석을 열심히 조사하면 꽤 많은 양을 얻을 수 있기에 게임 중반부터는 게임 오버 화면을 보긴 힘들다. 



사기가 전부 떨어지면 "나 그만 둘래!"하며 게임이 끝나 버린다. 


이 녀석을 만날 때가 아마 첫 번째 난관일 것이다. 




# 이 게임, 정치적입니다.

 

<디스코 엘리시움>에는 수많은 정치적 요소가 들어가 있다. 물론 정치는 실생활과 밀접히 맞닿아 있으면서도 다루기에는 거북한 주제이기에 잘못하면 '정치충' 취급받기 딱 좋은 주제다. 자칫하다간 싸움이 날 수도 있다.


하지만 <디스코 엘리시움>을 설명할 때 정치적 요소를 뺄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디스코 엘리시움>이 특정 사상을 은근히, 혹은 무조건 지지하는 작품은 절대 아니다. "모든 것이 틀렸어"와 같은 냉소주의나 극단적인 아나키즘으로 빠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세계관을 한 번 살펴보자. <디스코 엘리시움>의 배경은 레바숄이라는 도시다. 레바숄은 본래 '쉬렌 왕국'의 식민지로써 건설되었지만, 독립함하며 새로운 왕국이 되었다. 한 때 레바숄은 '세계의 수도'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크게 발전했다.


하지만 왕정 말기 벌어진 혼란으로 인해 결국 쇠락해버렸다. 레바숄의 마지막 왕은 코카인 같은 마약을 흡입하면서 업무를 볼 정도였으니 왕정 말기 레바숄이 어땠을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 



레바숄의 컨셉 아트 



결국 분노한 레바숄 시민들은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켜 시민 정부(코뮌)를 세웠다. 하지만 시민 정부도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엔 역부족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반대 세력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으며,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는 시민들은 사람 취급조차 해주지 않았다.


결국, 레바숄의 공산화를 우려한 주변 국가들은 연합을 형성해 레바숄을 공격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유정을 파괴하고 기름띠까지 만들며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비치 웨이드'라는 연합군의 대규모 상륙 작전을 막지 못하고 패배했다.


이제 레바숄은 '특별 행정 구역'이 되어 연합국의 지배를 받는 중이다. 주인공이 속한 레바숄 자경단(RCM)이 유일하게 남은 사법 집행 조직이다. 전쟁의 상흔은 아직도 도시 곳곳에 남아 있다. 길거리에는 아직도 포격과 총탄 흔적이 가득하다.


전쟁 속에서 살아남은 공산주의자나 왕정 지지파들도 레바숄 곳곳에서 사상 싸움을 벌이는 중이다. 중립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은 극히 적다. 덕분에 레바숄은 과거의 영광은 뒤로 한 채, 이념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끊임없이 고통받고 있다.



전쟁의 상처는 아직도 레바숄 곳곳에 남아 있다. 


노동자들은 조합원 전체가 의사결정권을 가질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구를 하며 파업하는 중이고,
기업은 겉으로는 노조와 협상하면서 비밀리에 용병들을 파견해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레바숄의 모습은 '출구 없는 터널'이 생각날 정도로 암담하다.



<디스코 엘리시움>의 세계관은 냉전 이후 혼란스러웠던 유럽 사회를 은유하고 있다고 본다. 공산주의자들이 레바숄에 세웠던 시민 정부는 프랑스 혁명 당시 세워진 '파리 코뮌'과 상당히 유사하다. 레바숄의 역사도 게임이 만들어진 '에스토니아'라는 동유럽 국가의 역사와 꽤나 비슷한 구석이 많다.


공산주의 혁명이 시작된 '그라드'는 '러시아'와 굉장히 유사하며 동양계 인물들의 고향인 '세올'은 아시아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레바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념 싸움은 현대 사회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상 싸움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외에도 많은 문학 작품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여기서 언급하는 코끼리는 조지 오웰의 '코끼리를 쏘다'를 말한다. 



심지어 게임은 여러 정치적, 문화적 요소들을 넘어 자신들이 다루는 RPG라는 장르마저 자조적으로 풍자한다. 게임 중반부에 망해버린 '게임 회사'를 조사할 기회가 있는데, 여기서 벌어졌던 일들은 게임 개발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많은 투자를 받아 의욕적으로 게임을 만들던 개발자들은 결국 너무나 커져 버린 프로젝트를 감당하지 못하고 뿔뿔히 와해되어 버렸는데, 이는 시간과 예산의 한계로 인해 원안의 많은 요소를 반영하지 못했던 <디스코 엘리시움>에 대한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꼭 <디스코 엘리시움>이 아니더라도 전혀 현실성없는 계획을 짜다가 결국 형편없는 결과물을 내놓은 일부 킥스타터 게임이 생각나기도 한다.



 

"그들의 계좌에는 40만 레알 밖에 없었지만, 4백만 레알의 제작비가 필요한 게임을 만들려 했다." 



이런 세계관을 보면 <디스코 엘리시움> 속 세계는 우리와 관계없는 머나먼 동유럽 속 이야기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동양인 차별'로 대표되는 인종주의는 우리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며, 국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정치적 대립과 격동 속 한반도 역사를 생각하면 레바숄의 모습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양 사회의 모습과도 상당히 겹치는 점이 많다. <디스코 엘리시움>은 의외로 중화권에서 많이 판매됐다.

 

그리고 게임 속 정치적 이야기들은 플레이어가 생각 캐비닛 속에 내면화한 주제와, 레벨을 올려 투자한 스킬과 유기적으로 조화되며 새로운 경험을 창출한다. 플레이어는 모든 것을 까먹어버린 형사다. 그렇기에 게임을 플레이하는 우리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디스코 엘리시움>속 세계관을 완전히 이해한 것이 아니고, 이는 주인공도 동일하니까.


게임을 플레이하며 '생각 캐비닛'에 특정한 사상을 담고, 수많은 등장인물과 대화하고 생각을 나누며 레바숄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쌓아가는 게임 플레이는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며 자신만의 생각을 정립해 나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이 과정이 워낙 자연스럽기에 쌓아 온 능력치나 선택지가 제대로 반영되기 시작하는 게임 중반부에 들어서는 꽤 재미있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더욱 좋은 것은 <디스코 엘리시움>이 자신들이 담아낸 메시지를 교조적이고, 계몽적인 태도 속에서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요즘 많은 게임이 받는 비판을 생각해 보면 꽤나 좋은 자세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곤 있지만 모든 주장에는 장점과 단점, 그리고 사상을 뒷받침하는 충분한 사유가 깃들어 있다. 원한다면 극단으로 치우쳐진 사상을 거절하고 중립을 지킬 수도 있다(꼭 이상적이진 않지만). 게임은 플레이어가 특정 사상을 지지하더라도 "그렇지, 네 생각이니까"라며 경험 속에서 빚어낸 결과를 존중해 준다. 그러면서도 인종주의 같은 차별에 대해선 단호히 비판한다.


그렇다고 <디스코 엘리시움>이 정치적인 게임이라고 해서 사상을 가지길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게임은 자연스럽게 플레이어가 생각하도록 유도할 뿐이다. 여기에 대해 어떤 결론을 지을지는 순전히 개인의 자유다. 꼭 이런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세계관을 전부 이해할 필요도 없다. 힘과 운동 능력치에 모조리 올인한 후, 말 그대로 '무대뽀 형사'가 돼서 복잡한 텍스트는 전부 치워 버리고 모든 것을 힘으로 해결할 수도 있다. 



'육체' 능력치 위주 캐릭터라면, ‘돌려차기’는 꼭 해봐야 한다. 




 # 이 게임은, 술친구 같습니다

 

앞서 말한 이야기를 생각하면 <디스코 엘리시움>은 정치적이고, 수많은 사회문화가 녹아들어 있는 복잡한 작품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게임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간단하다. 블랙 유머를 통해 세상 모든 것을 조롱하고 희화화할 것처럼 굴던 게임은 결말을 통해 자신들이 진정으로 다루고자 하는 주장을 은근슬쩍 전달한다. 마치 친한 친구와 술자리를 가지는 것처럼.


친구와의 술자리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늘 술을 마시며 똑같은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직장 이야기, 학창 시절의 추억, 연예인의 가십 같인 즐거운 서두를 연다. 취기가 올라오고 안주가 비워지면 이제 마음속에 묻어둔 감정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얼굴은 벌게지고 목소리는 커진다. 현실을 살며 가슴 한 켠에 쌓아둬야만 했던 슬픈 이야기를 꺼낸다. 눈물을 보일 때도 있고, 유머로 우울함을 포장할 때도 있다. 우리는 술 한 잔에 기대 서로의 상처를 보듬곤 한다.


왁자지껄하게 시작했던 술자리가 어느새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위안하는 장소로 바뀌듯이, 폭주 기관차처럼 가감없이 현실을 비꼬고 풍자하던 <디스코 엘리시움>도 게임의 끝 무렵에선 슬쩍 플레이어의 옆으로 돌아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눈다. 슬프고 비관적이기만 한 세상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는지에 관해서.


주인공이 처한 상황은 굉장히 기구하다. 솔직히 말해서 외모는 잘생겼다고 말하기 힘들다. 되는 일은 하나 없다. 신분증도 잊어버렸고, 집 주소조차 까먹어서 숙박비를 내지 못한다면 노숙을 해야 할 처지다. 고향인 레바숄은 아직도 사회 혼란을 해결하지 못하고 골골 앓고 있다.


정치인들은 양극단에 서서 "우리가 무조건 옳다"라며 고함을 빽빽 질러댄다. '무시무시한 반전'을 생각하고 수사한 사건들의 진상은 시시하고 허무한 경우가 대다수다. 주인공은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술독에 빠져들어 기억상실까지 겪고 있는 일개 형사일 뿐, 혼돈에 빠진 레바숄을 구원할 '드래곤본'이나 '선택받은 자'가 아니다.

 


외모는 못생겼고 


되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다. 



어떻게 보면 우리 인생도 참 비슷하다. 구태의연한 현실은 오늘도 바뀔 생각이 없다.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일들은 항상 허무한 결과를 맞곤 한다. 신문을 펼치면 자극적인 뉴스가 판을 치고, 세상은 당장 망할 것만 같다. 정치인들은 양 극단에 서서 분열과 싸움을 부추기고 있다. 

 

아무리 노력한들 이 병든 현대 사회는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슈퍼 히어로'가 아니니까. 꿈이 넘치던 학창 시절 생각했던 인생은 이게 아니였다.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다. <디스코 엘리시움> 속 이야기는 답답한 현실을 살아가는 소시민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설정 속에서 게임은 조용히 묻는다. 답답하고 극단적인 것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무엇인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디스코 엘리시움>은 다분히 정치적인 게임이면서도, 사실 진짜로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매우 간단하면서도 이상적인 내용이다. 이 주제는 플레이어의 선택과 행동, 그리고 복잡한 게임 디자인과 기가 막히게 얽혀들어가며 무시무시한 설득력을 가진다. <디스코 엘리시움>은 희망, 사랑, 기적 그리고 막막한 현실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당신에 관한 이야기다.

 


 

# 마치며

 

조금 삐딱하게 보자면 "텍스트로 점철된 지루한 게임을 단순히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았다는 이유로 극찬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확실히 <디스코 엘리시움>은 누구에게나 권할 만한 게임은 아니다. 쏟아지는 텍스트, 느린 진행, 복잡한 세계관을 보면 취향 타는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불편한 요소도 많다. 넓은 맵을 돌아다녀야 하는데 '빠른 이동'은 지원하지 않고, 방대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전조차 제공하지 않는다. 원활한 진행을 방해하는 버그도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그리고 <디스코 엘리시움>은 '형사 RPG'라고 홍보하고 있지만 사실 추리물과는 거리가 멀다. 평단의 엄청난 호평을 받은 게임이라고 '입이 떡 벌어질 만한 반전과 스토리'를 기대하면 실망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런 장르에 익숙한 게이머라면, 쏟아지는 텍스트 속에서 오히려 즐거움을 느낀다면, 현실과 사상의 괴리 속에서 고민을 품어본 적이 있는 시민이라면 <디스코 엘리시움>은 한 번쯤 플레이 해볼만한 게임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돌아서서 떠나. 자유를 위해 폐허를 떠나 앞으로 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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