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s&Guides] [리뷰] 힌피톨(Hynpytol)
2023.09.22 스토브인디 출시. 정가 \15,000
총 6.9시간 플레이. 엔딩 감상 완료.
모든 도전과제 완료.
적지 않은 이들에게 과학이란 어렵고 복잡하며 나아가 고리타분하게 느껴지곤 한다. 누군가에게는 고등학교 시절 따분한 수업의 일부였거나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때 점수를 깎아먹는 나쁜 과목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본인 또한 과학탐구 영역을 잘 못해 수학능력시험에서 점수를 많이 깎아먹었던 안 좋은 기억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때로 좋은 게임 소재로 활용되기도 한다. 각종 물리 법칙이나 화학식, 생체 기전, 기후 현상 같은 것들은 수많은 게임의 배경 설정이나 핵심 시스템으로 쏠쏠히 응용된 적이 많으며, 아예 이를 발상으로 한 게임들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원소 기호와 화학식을 소재로 한 소코본드(Sokobond) 같은 게임이 좋은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과학을 소재로 한 게임이 많은 이들에게 재미를 선사하는 좋은 게임이 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게임성에 대한 고민이 우선되어야 하기 마련이다. 과학에 담긴 이론과 사실에 충실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거기에 너무 집착해 게임의 재미를 등한시한다면 그저 과학에만 집착한 게임으로 남을테니 말이다. 그런 점에 있어 백혈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퍼즐 게임 흰피톨(Hynpytol)은 과학적인 사실을 재밌는 게임으로 풀어낸 좋은 사례로 언급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원소 화학식을 활용한 퍼즐 게임. 그러고보니 이것도 소코반 스타일이다. [소코본드(Sokobond)]
희망은 없다. 그래도 달린다. 그것이 흰피톨이니까, 흰피톨(Hynpytol)
흰피톨은 작고 하얀 세포인 흰피톨을 조종해 퍼즐을 풀어 길을 열고 앞으로 나아가 주어진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소코반 스타일의 퍼즐 게임이다. 패미컴이나 게임보이 콘솔이 절로 떠오르는 픽셀 그래픽의 비주얼과 사운드트랙이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데, 전형적인 레트로 지향이긴 해도 한국에서만큼은 대기업 게임과 인디 게임을 막론하고 쉽게 보기 힘든 감각의 게임이라 더욱 신선하게 다가온다. 여기에 밀고 당기는 독특한 조작과 더불어 소코반 스타일을 색다르게 운영한 퍼즐 디자인 또한 인상적이다.
여담으로 흰피톨이라는 게임의 제목은 왠지 모르게 외래어 같아 어색하게 다가올 수 있겠지만, 의외로 백혈구를 지칭하는 순우리말이라고 한다. 혈액을 구성하는 세포 중 하나이자 체내 면역에 큰 역할을 하는 백혈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게임인 셈이다. 여기에 각종 혈액 세포와 조직이 NPC로 등장해 존재감을 드러내는데, 이로 보아 인간의 신체 일부를 배경으로 한 게임이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처음 게임 제목 들었을 땐 자일리톤 같은 외국어인 줄 알았다. 알고보니 백혈구의 순우리말이라고,
기본적인 조작 방식부터 남다른 면모를 드러내는 게임이다. 이동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팔을 뻗어 벽에 손을 접착시킨 뒤 반대 방향으로 팔을 잡아당겨 벽이 있는 곳까지 쭉 나아간다. 혹은 이 방식을 응용해 멀리 있는 사물을 흰피톨이 있는 곳까지 잡아당기거나 사물의 반대 방향으로 팔을 뻗친 뒤 흰피톨 스스로를 밀어 사물을 멀리 보낼 수도 있다. 이른바 '밀고 당기기'를 핵심으로 한 이색적인 조작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꽤나 독특하고 참신하긴 하지만, 이 때문에 한 번의 이동에만 두 번 이상의 조작을 요구하는 데다가 벽이나 사물의 위치나 거리까지 고려해야 해서 손과 머리가 꼬이기 쉽다. 실제로 빠르게 흰피톨을 움직이며 급하게 게임을 플레이하려고 하면 의도치 않게 다른 방향으로 손을 뻗치거나 하는 상황을 쉽게 접하게 된다.
소코반 스타일 기반에 독특한 조작을 잘 반영한 다양한 기믹 또한 인상적이다. 흰피톨에는 총 여섯 개의 챕터가 존재하며 각 챕터마다 새로운 기믹이 하나씩 추가된다. 이를테면 막의 색깔에 따라 사물과 흰피톨 중 한 가지만 통과할 수 있는 여과막이 존재하기도 하고, 위험한 바닥을 먹어치워 청소해주는 대식 세포가 존재하기도 하며, 같은 선상에 있을 시 임시로 벽을 형성하는 림프 세포가 존재하기도 한다. 이런 다양한 기믹이 퍼즐의 종류를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데 일조한다.
팔을 쭉 내밀어서 확 잡아당긴다. 이것이 이 게임의 기본적인 조작.
전반적인 퍼즐의 난이도는 대체로 살짝 어려워 적당히 머리를 굴려야 하는 수준이지만, 세부적으로 보면 구간마다 난이도 배분이 조금씩 다르다. 우선 별도의 제약이 없는 순수 퍼즐 구간의 경우 퍼즐의 구성이 단순한 편이라 밀고 당기는 독특한 조작과 각 기믹의 특성만 잘 숙지하고 있으면 너무 오래 고민하지 않는 선에서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다. 한 눈에 보기에 어려워보이는 퍼즐도 발상을 조금만 전환하면 그 해결책이 단순한 경우가 꽤 있다. 여기에 각 퍼즐의 특성을 센스있게 드러내는 퍼즐 제목으로 퍼즐의 구성과 해결법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으며, 초반 한정이긴 해도 다른 세포가 넌지시 던지는 단서가 나름 큰 도움이 된다.
그에 반해 제한 시간 안에 모든 장애물을 처치하고 탈출해야 하는 스피드런 구간은 여러 번의 시도가 요구될 만큼 그 난이도가 쉽지 않다. 가뜩이나 두 번 이상의 방향키를 눌러야 하는 번거로운 조작으로 인해 움직임이 지연되고 손이 꼬이기도 쉬운데 제한 시간마저 촉박한 감이 있어 한 번에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가하면 일부 스피드런 퍼즐은 단순히 빠르게 플레이하는 것뿐만 아니라 타이밍을 정확히 맞춰야 하고, 최후반부 대탈출 구간은 여태껏 나왔던 모든 기믹이 총동원되는 데다가 도중에 실패하기라도 하면 무조건 맨 첫 장면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니 그 압박감이 상당하다.
그래도 전반적인 퍼즐의 구성과 난이도 배분에 있어서는 적당히 맵고 짜게 느껴질 만큼 맛있는 난이도를 선보여 만족도는 꽤나 높은 편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퍼즐 이외의 구간에서 아쉬운 점이 한 가지 드러나는데, 한 챕터를 해결한 이후 다음 챕터로 나아가기가 힘들다는 점이 그것이다. 나아갈 길에 대한 안내가 부족할 뿐더러 은근히 눈에 보이지 않는 숨겨진 길이 많은지라 의외로 여기서 갈피를 잡지 못할 수 있다. 기껏 퍼즐 잘 풀어놓고 길을 몰라 헤매게 되는 셈인데, 이 점만큼은 확실히 개선이 필요해보인다.
생각보다 해결책이 단순할 때가 많다. 쉽게 쉽게 생각할 것.
시간 제한이 걸리니까 가뜩이나 어려운 조작 때문에 손이 더 꼬이기 쉽다.
스토리는 다소 미스테리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면역계라 불리는 게임의 세계관은 시종일관 불안하고 위급한 분위기를 드러내고 흰피톨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그리고 게임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상황은 더욱 절망적으로 흘러간다. 여기에 이리저리 일그러지고 부서진 듯한 기괴한 느낌의 픽셀 글리치 비주얼이 미스테리한 분위기를 더욱 부각시킨다. 다만 스토리가 이해하기 쉽지 않을만큼 모호하고 흐릿하게 묘사되는 감도 없지 않은데, 보기에 따라서는 무슨 이세계물을 보는 듯한 기분도 든다.
사실 이는 실제 면역 체계를 모티브로 한 스토리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당장 주인공 흰피톨을 비롯한 여러 세포와 조직의 이름이 전부 백혈구와 연관된 것들이고, 스토리의 내용 또한 외부에서 침입한 바이러스에 대항해 면역 체계가 대응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딱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체 면역 체계의 기전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전반적인 이야기의 흐름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게임을 플레이하는데 면역 체계에 대한 지식이 필수인 수준은 아니고, 게임을 접하기 이전이나 이후에 나무위키 등지를 통해 관련 지식을 참조하면 게임을 더 흥미롭게 즐기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작은 세포 친구들이 등장하는 스토리라는 건 알겠는데,
그냥 스토리만 놓고 보면 무슨 이세계물인가 싶기도 하다.
잘 모르겠으면 나무위키에서 '백혈구' 항목을 한 번 읽어보도록 하자. '에볼라'까지 읽어보면 더 좋고,
흰피톨은 한국산 게임에서 보기 쉽지 않은 신선한 감각의 레트로풍 비주얼과 사운드, 독특하면서도 조금은 번거로운 조작, 그리고 다양한 기믹과 매커니즘을 적절히 녹여낸 퍼즐 디자인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수준 높은 퍼즐 게임이다. 제한 시간이 걸린 스피드런 구간이 조금 빡세게 다가올 순 있지만, 전반적인 퍼즐의 구성과 난이도 배분이 좋아 부지런히 두뇌를 굴리며 플레이하기에 정말 좋다. 대략 6시간에서 8시간이면 모든 퍼즐을 풀고 엔딩을 감상할 수 있을만큼 플레이 타임도 나쁘지 않은 편이며, 실제 면역 체계를 기반으로 한 캐릭터와 스토리는 어느 정도 관련 지식이 있다면 더욱 흥미롭게 다가올 것이다.
그런만큼 흰피톨은 올해 개최됐던 부산 인디 커넥트 페스티벌 2023에서 루키 부문의 게임 디자인 상을 수상한 게임이니만큼 그 가치를 여실히 드러내는 게임이라 할 수 있다. 어지간한 수작 퍼즐 게임과 견줘봐도 모자라지 않은 재밌는 퍼즐 게임으로 적극 추천한다. 개인적으로는 "흰피톨 타임 어택 챌린지" 같은 걸 열어도 꽤나 재밌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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