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야의 노래가 '순애'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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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s&Guides] 사야의 노래가 '순애'인 이유 [12]

* TRUE END에 대한 스포일러 있음

  + 뒤에 작품 전반의 해석과 나머지 루트 스포일러 추가됨


포장하는 말은 뒤로 밀어두고 굉장히 재밌는 작품이었습니다. 우로부치 씨께서 사야의 노래에 심어둔 문학적 장치나 상징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좀 더 고심이 필요하겠지만, 선험적으로 느껴지는 작품의 정서만 보더라도 군더더기 없이 훌륭한 이야기라는 점에는 의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로부치 씨는 글을 정말 잘 쓰는군요. 문장 하나하나가 너무 잘 빠져 있어서 읽는 맛이 좋습니다. 외에는 사야가 귀여웠습니다.


사야의 노래라는 작품의 테마는 아무래도 사랑인 듯한데, 단지 사랑이라는 키워드 하나만 가지곤 주제로서 곱씹는 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플레이어들이 철학자도 아니고. 그래서 제가 주목한 부분은 '아이러니'입니다. 주위가 고깃덩이로 보이는 후미노리는 사야를 만난 이후 괴물투성이인 세계에서 겨우 인간적인 것들을 얻어갈 수 있었고, 후미노리를 사랑하는 사야 또한 그 형태가 살짝 독특할 뿐 분명 인간다움을 간직하고 있죠. 언뜻 보기엔 후미노리가 사야를 선택하는 장면이 인간적인 것을 얻어가긴커녕 인간으로서 버려선 안 될 걸 버리고 사랑을 택하는, 사이코 드라마 장르에서 흔히 나오는 상식이 어긋난 사이코 커플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둘에겐 확실하게 서로를 만나기 전까진 없었던 인간다움이 있고, 그 인간다움을 지탱하고 있는 건 사랑입니다. 즉, 후미노리와 사야에게 있어서 인간다움이란 사랑과 같다는 겁니다. 이건 남들 눈에는 후미노리가 단지 광인으로 비추어질지언정 사야와의 관계가 숭고한 것이라는 점은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후미노리와 사야를 그저 한 명의 광인과 한 마리의 괴물로 보는 이들은 어떨까요. 사야의 노래에서 열심히 구르며 활약해준 인물은 일방적으로 당한 오우미와 이에 더해 눈을 즐겁게 해준 요우도 있지만, TRUE END에서 클라이맥스까지 함께 한 코우지와 료코를 빼놓을 수 없죠. 그들의 눈에 후미노리가 광인으로만 비추어지는 건 어쩔 수 없고 또 실제로 후미노리와 사야에게 광기가 서려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만, TRUE END에선 이야기가 후반부로 치달을수록 코우지와 료코에게도 모종의 업(業)이 주어집니다. 1년 전 사건을 계기로 오우가이 마사히코가 뻗은 끔찍한 뿌리의 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정 많아 보이는 여의사와, 친구의 돌변에 당혹속에서도 선의가 탁해지지 않고 정의를 관철하며 움직인 결과 끔찍한 뿌리를 목도한 청년. 이 둘은 후미노리와 사야를 죽이겠다는 일심으로 합쳐지는데, 여기까지만 보면 악행을 저지르고도 형편 좋게 전개가 흘러가 지금껏 죄값을 치루지 않은 주인공 일행에게 드디어 업보가 닥쳐오는 클라이맥스구나, 싶은 전개로 받아들여지지만, 우로부치 씨께선 그렇게 단순 명쾌하게 서사를 짜 놓지 않으셨답니다.


맥락적으론 그리 착각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코우지는 이미 더할나위 없이 충분한 광기를 머금었고, 료코는 애초부터 1년 전 이래로 광기 없인 살아갈 수 없는 상태였죠. 최후의 결전이 그리 찝찝하게 그려진 것과 다 죽어가던 사야가 마지막까지 후미노리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뺨을 어루만져주고 세상을 뜬 것, 코우지가 미쳐버리는 엔딩으로 끝난 후에 이야기는 저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마지막까지 순애(純愛)를 관철한 후미노리와 사야, 그런 둘을 끝장내기 위해 인간으로서의 선을 기필코 넘어선, 그리고 이미 넘어있던 두 명. 과연 어느 쪽이 승리일까?


양측의 결정적인 차이는 그것이 단지 광기였는가, 아니면 사랑이었는가 입니다. 그게 핵심 포인트고 승패가 갈리는 이유입니다. 그렇기에 후미노리와 사야의 사랑은 그렇게 끔찍하고 불쾌함에도 숭고한 것이고 또 인간 보다 더욱 인간다우며, 코우지 같은 주위의 인간들은 결국 모조리 광기와 함께 최후를 맞이하고 후미노리의 눈에는 그들이 괴물로밖에 안 보이는 것이죠. 그것이 사야의 노래의 테마인 순애입니다.


이건 아이러니랄까, 참 얄궂습니다. 얄궂은 이야기이기에 더욱 재밌습니다. 페이트 제로와 마마마 때도 생각했던 건데 우로부치 씨는 이런 걸 정말로 잘하는군요. 좀 더 이 악마적인 재능을 발휘해서 좀 더 좀 더 많고 다양한 걸작들을 집필해주길 원합니다.


+ 방금 모든 루트를 클리어했기에 그에 대해서도 적어볼까 합니다. (스포일러 있음)


엔딩이 GOOD과 BAD, TRUE 세 가지로 나뉘는데 어떤 루트에서도 사야와 후미노리는 순애를 관철하는 게 정말 좋네요. BAD에서 사야가 후미노리의 머리를 고쳐준 이유가 담긴 문장이 출력됐을 때는 가슴이 미어터질만큼 애달팠습니다.


정리하자면 TRUE END는 데즈카 오사무에 대한 우로부치 씨의 오마주, GOOD END는 러브크래프트에 대한 우로부치 씨의 오마주로 보입니다. 사야의 노래를 집필하기 전 슬럼프에 빠져 있던 우로부치 씨에게, 선대의 대선배들의 어프로치가 앞선 오마주를 통해 빛을 발하며 빚어낸 게 <사야의 노래>라는 작품이고, 사야의 노래란 제목은 이 작품에 담긴 인간의 아이러니와 초자연적 공포에 사랑의 정서가 담긴 함축적이고 시적인 이름인 게 아닐까 싶습니다.


사야의 사랑이 숭고한 이유 중 하나로 앞서 제가 짚어낸 '인간다움'과 '광기'의 아이러니가 있습니다만, 이 부분이 데즈카 오사무의 오마주인가 봅니다. 일본 만화는 전후(戰後)에 나타난 데즈카 오사무의 등장 이래로 다양한 아이러니를 다뤄왔고, 그건 일본 만화만의 특권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서브컬쳐의 독특한 색체와 고유한 매력이 되는 원형이고, 강력한 무기입니다. 저희들이 입덕 초기에 일본의 작품만이 유독 독특하고 별나다고 느낀 건 단순히 그 시점에서 식견이 좁았기 때문만은 아닌 겁니다. 그런 데즈카 오사무라는 대선배로부터 우로부치 씨가 어떤 부분에서 어프로치를 받았는지는 <철완 아톰>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아톰의 내용은 인간의 마음을 가졌으나 몸은 기계인 인간적인 로봇 아톰과, 그런 아톰을 형편 좋게 부려 먹으면서 어떨 때는 차별하고 탄압하는 이기적인 인간 사이의 아이러니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아님에도 더욱 인간적인 인외와, 그에 비해 끝없이 추락한 모습만 보여주고 있는 주위의 인간들. 이건 사랑이라는 이름의 인간다움을 간직한 사야와 그를 막기 위해 인간이길 포기하고 광기에 빠진 코우지와 료코 같지 않나요? 그 원형이 되는 게 <철완 아톰>의 아이러니이고, 그것의 오마주는 코우지에게 구타당하면서도 마지막까지 후미노리의 곁으로 이동해 뺨을 어루만져 준 TRUE END의 명장면으로 완성되는 겁니다. 인간다움이란 사랑을 간직한 사야의 마음을 코우지의 광기과 대비시켜 실로 은유적이고 역동적이게 담아낸 최고의 장면인 거죠.


러브크래프트에 대한 오마주는 작품 설정 전반에 깔린 코즈믹 호러적인 요소라는 건 굳이 짚어낼 필요도 없겠지요. 그것이 순애와 결합한 GOOD END는 정말이지 그 섬찟함에 전율하게 될만큼 숭고한 사랑을 느꼈습니다. 사야가 날개를 펼치며 우화하는 장면은 말이 필요 없는 명장면, 그 이후 지구에 닥쳐온 위기, 인간이라는 우주의 관측자가 아득히 먼 차원의 초월자에 의해 멸하고 지배 되어가는, 모든 게 부질없고 허무하게 느껴지는 무력의 공포는 저로 하여금 떨림도 없이 사고를 차게 마비시키는 원초의 본능을 맛보게 했는데, 한편으론 그것이 세계를 뒤덮은 사야의 후미노리만을 위한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그 숭고한 사랑 앞에서 전율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 신화 정서를 가져와 그것을 순애로 묶어 오마주로 승화시킨 우로부치 씨의 역량에는 감탄스러울 따름입니다.


BAD END는 구태여 시적이게 포장하자면 사야와 후미노리의 가장 왕도적인 순애라고 볼 수 있겠죠. 배드 보단 새드 엔딩에 가깝다는 게 솔직한 감상입니다. 앞선 두 루트가 각각 인간적인 아이러니, 코즈믹 호러와 결합하여 순애라는 테마를 관철했다면, 이 루트에서 후미노리와 사야는 상징적인 무언가의 정서 없이 그저 사랑을 나누고 지극히 문학적인 갈등에 가로막혀 작별을 고합니다. 이 엔딩은 극히 극히 문학적인 맛이 나서 이건 이거대로 좋았습니다.


만약 누군가에게 이 작품을 추천한다면 꼭 엔딩은 TRUE-> GOOD-> BAD의 순서로 보라고 해주고 싶네요.

플레이타임 11시간 동안 매우 즐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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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


N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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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시간 20/02/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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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야의 노래가 '순애'인 이유 [12]

20/02/2026
20/02/2026 01:58 AM
작성 시간 30/01/2025

모바일 [1]

30/01/2025
30/01/2025 05:30 PM
작성 시간 29/10/2024

dlc 적용 어떻게 하는 건가요ㅠㅠ

29/10/2024
29/10/2024 03:20 PM
작성 시간 01/10/2024

게임 실행이 안 되네요... ㅠ.ㅠ [3]

01/10/2024
01/10/2024 11:06 AM
작성 시간 10/03/2024

dlc가 잘 적용된 건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 있을까요 ㅠㅠ

10/03/2024
10/03/2024 10:38 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