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번외편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오일머니.
그중에서도 요즘 게임판을 적극적으로 흔드는 사우디아라비아입니다.
금주의 소식을 다루는 겜잡식과는 시기성은 맞지 않지만, 그렇다고 무시하기에는 너무 큰 주제라서, 이렇게 번외편으로 들고 왔습니다.
최근 사우디가 진행한 다양한 게임 관련 투자들
▷ 게임 워싱? 스포츠 워싱이란?
스포츠 워싱이란, 스포츠를 이용해 국가나 기업의 이미지 세탁을 노리는 전략을 말합니다.
스포츠 행사 개최, 스포츠팀 구매 또는 후원, 또는 스포츠 참여를 같은 다양한 방식이 있죠.
그리고 이걸 게임이라는 매체를 통해 진행하니 “게임 워싱”이라 부를 수 있겠죠!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의 ‘게임 워싱’ 전략은 점점 더 노골적이고 다각적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단순한 투자 수준을 넘어, 글로벌 게임·e스포츠 생태계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해지고 있죠.
짧게 전해드렸던 ‘신도시 프로젝트 키디야’에서, 살짝 뜬금없이, 세계 최대의 격투 게임 행사 EVO의 운영사를 인수한 것도 있고,
사우디 국부 펀드가 유비 소프트에 대규모 투자 및 DLC 지원을 한 사실도 있습니다.
2022년부터 매년 개최되어 온 세계 이스포츠 월드컵(EWC) 또한 사우디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에서 진행되고 있죠.
EWC는 이미 스포츠 워싱 뿐만 아니라, 사우드 왕조 및 EWC 대회에 대한 비판을 못 하도록 입막음 한 것으로 논란이 되어 왔습니다.
단순히 KING이라는 글자가 있다는 이유로 플래카드 반입을 저지당하기도 한다고…
아무튼, 오일머니라고 부르는 천문학적인 자금력을 바탕으로 ‘더없이 화려하게’ 게임 업계의 제왕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마치 게임 문화의 허브를 사우디의 수도 ‘리야드’로 옮겨올 기세입니다.
15만 평짜리 게이밍 e스포츠 도시를 만드는 사우디. 그 심장에 위치할 ‘키디야 아레나’
▷ 왜 굳이 이렇게까지?
사우디아라비아는 폐쇄적인 정치 구조(왕정)로 인해, 젊은 사람들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국제적으로 꽤 골치 아픈 이미지가 있습니다.
가장 큰 요소는 역시나 인권 탄압.
2018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Jamal Khashoggi)가 터키 이스탄불의 사우디 영사관에서 살해된 사건은 국제적 충격을 불러왔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정치적 반대자, 여성 인권 운동가, 종교적 소수자에 대한 체포·구금 사례가 빈번하죠.
그리고 이들에 대한 ‘사형 집행 남용’ 또한 국제적으로 비난받아 왔습니다.
위 내용들과 같은 궤를 달리는 이야기지만, 언론인을 암살하는 만큼 언론 탄압도 잦고,
종교적인 이유로 여성은 남성의 허락 없이 여행, 결혼, 취업 등이 제한되는 구조도 있습니다.
이 근본에는 절대 군주제에 가까운 ‘강력한 왕실’ 중심의 통치가 있죠. 당연히 왕정이니 정당 활동이나 정치 활동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왕가에 대한 비판은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를 감시하는 ‘종교 경찰’은 공산권의 그것과 같이, 민간인도 사찰하는 등,
최소한 ‘민주 진영’은 아니라는 말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강력한 자본력을 바탕에 두고 있어 ‘자본 진영’에 속합니다.
이러한 리스크들은 국제사회에서 사우디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고 있으며,
이를 게임 투자로 이미지를 개선하거나 바꾸려는 전략을 펼치려 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진짜 게임을 좋아해서 이러는 걸 수도 있지만, 투자처에서는 “큰 돈을 지불해준 투자자를 비판하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 입니다.
자발적 자기 검열을 배제할 수는 없다는 말이죠.
신도시 키디야의 상상도. ‘플레이하기 위해 지어진 도시’라고 합니다.
▷ 게임 업계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세 가지 시선
게임 업계는 세 가지로 의견이 갈리고 있습니다.
1. 환영론: 산업 안정과 성장
판데믹 이후 많은 게임사들이 해고·폐쇄·프로젝트 취소를 겪고 있습니다만, 사우디의 등장은 정말 중요한 생명줄로 작용하고 있죠.
EVO 의 인수에도 ‘이대로라면 위기였다.’라는 말이 많을 정도로, 사우디의 자금은 업계에 있어서는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있습니다.
특히 2030년까지 세계의 게임 허브가 되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50조 원 이상 투자를 하고 있기에,
최근 정체기를 경험하고 있는 게임 업계는, 위기를 극복하고 큰 장벽을 넘어 성장할 기회로도 보고 있습니다.
실은 한국 게임사들도 사우디 국부펀드의 많은 투자를 받고 있습니다.
2. 경계론: 콘텐츠와 가치의 침투
자국 언론에 대해서도 검열과 탄압을 가하는 사우디이기에, 이건 따라붙을 수밖에 없는 걱정입니다.
바로 사우디에 투자를 받은 게임회사들이 게임을 만들 때, 자발적으로라도 정치적 검열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제기되죠.
대표적으로 철권7에 갑작스럽게 추가된 “샤힌”이라는 아랍계 캐릭터.
철권 태그 2 기체를 무려 200대나 구매한 사우디아라비아 왕국 석유 재벌 덕에 탄생한 캐릭터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격투 게임에서는 전례가 없었던 미남 아랍 캐릭터였습니다. 이렇게 문화가 자연스럽게 침투되는 것이죠.
철권 8의 샤힌.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살짝 강캐였습니다.
3. 반대론: 투자받은 게임이나 스포츠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구조적 폭력에 동참하는 행위다.
“게임은 재밌으면 됐지”라는 말은 편할지 몰라도, 만약 게임이 인권 탄압을 덮기 위한 도구로 쓰인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망하면 망했지, 이런 자본에 손을 벌려선 안 된다”라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일부 커뮤니티에서는 실제로 사우디 자본이 개입된 대회에 불참하거나, 불매 운동을 논의하기도 했습니다.
이 주장은 오래된 윤리적 딜레마, “물건에 죄가 있는가?”라는 도덕적 소비자 딜레마로 이어집니다.
즉, 나치가 만든 물건을 소비하는 것이 곧 나치에 협력하는 행위일 수 있듯,
사우디의 자본이 들어간 게임을 즐기는 것 자체가 그 이데올로기를 묵인하거나 미화하는 위험을 동반한다는 겁니다.
*도덕적 소비자 딜레마 (Ethical Consumer Dilemma)
아동 노동, 환경 파괴, 인권 탄압 등으로 만들어진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 구조적 폭력에 동조하는 것인가? 아닌가?
‘SPC 삼립 빵 공장 사고에도, SPC 삼립 제품을 구매하는 게 맞는가?’ 이쪽으로 접근하시면, 의미가 더 명확하게 느껴지실 겁니다.
사우디의 게임 산업을 주도하는 ‘무하마드 빈 살만 총리(왕세자)’
▷ 결론: 환영하되, 경계하라
현재 게이머나 업계의 입장에서 현실적인 태도는 “환영하되, 경계하라”일 겁니다.
사우디 자본은 분명 게임 업계에 새로운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망할 뻔한 기업에 기회를 주고, 게이머에게는 그런 기회의 결과물을 안겨주죠.
커다란 자본을 등에 업고, 평소라면 시도할 수 없었던 살짝은 무모한 도전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돈이 단순한 투자에 머무르지 않고, 콘텐츠와 메시지를 바꾸려 드는 순간 게이머는 소비자가 아닌 들러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게이머라면, 환영하더라도 절대 경계를 풀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게임과 대회에 어떤 자본이 들어왔는지 투명성을 요구하고,
스토리에 누군가의 입김이 과하게 작용한 것은 아닌지 감시하고, 솔직하게 비판하며,
커뮤니티의 주도성과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이죠.
게임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세계관과 가치를 담는 매체이기 때문입니다.
“재밌으니까 그냥 한다”라는 태도만으로는, 의도치 않게 누군가의 세탁 전략에 동조하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승리의 여신: 니케의 개발사 시프트업은 사우디 국부펀드와 업무 협약(MOU)을 체결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해외 축구 팬으로써 익숙한 이슈네요.
실제로 서문에 있듯이 흔히 '오일머니'로 일컬어지는 중동의 부자들(대부분 왕가)이 이전부터 유명 축구팀들을 인수하여 막대한 자본을 쏟아부어 이미지를 좋게 만드는 전략을 펼치고 있었죠.
최근에는 몇 년 사이 사우디 프로 축구 리그에서도 엄청난 돈을 풀며 호날두와 같은 유명 선수들을 영입하기도 하는 등 여러 산업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제는 게임까지 손을 뻗치는 걸 보니 문화적으로 계속해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생산하려는 모습인 것 같네요.
SNK의 아랑전설 시티 오브 더 울브스에 사우디 리그에서 뛰는 호날두를 무지성으로 넣는 걸 보고 어이가 털려서 말이 안나왔습니다.
유익한 정보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