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7 팬픽 - 혼자라는 고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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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7 팬픽 - 혼자라는 고독 1. [2]

2.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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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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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설원

 

눈보라가 설원을 뒤덮는다.

바람은 살을 에일 듯 날카롭다.

온통 흰, 흰, 흰색으로 물든 세상에

흔적도, 그림자도 남지 않고 전부 지워진 가운데

울부짖는 바람과 부딪혀오는 눈송이만.

 

북방 대륙 에우레카의 모두가 겨울이라는 계절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몇몇 지역은 저 아래의 리타니아 만큼이나 기후가 온화하다. 레펀도스 남부와 폴리티아는 옷만 두껍게 입으면 한겨울에도 별 무리 없이 바깥을 돌아다녔다. 그들에게 겨울은 그저 사계절 중 하나인 것이다.

그러나 약간만 위로 올라와도 상황이 달라졌다. 윈텐베르크 전역과 옛 왕도가 있는 레펀도스 북부 지역, 특히 설원 변두리에 있는 작은 마을의 주민들에게 한겨울에 집 바깥으로 나가는 행위는 곧 목숨을 건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들에게 겨울은 실재하는 두려움이었다.

한 번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짧으면 며칠, 길면 몇 주일에 걸쳐 쉬지 않고 내렸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세게 하늘과 땅을 뒤덮었다.

눈이 올 때 바깥에서 길이라도 잃으면 몸 위로 쌓이는 눈을 무덤삼아 동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날씨를 읽는 법을 터득했다. 이들은 날씨가 나빠질 때 나타나는 미세한 징조를 꿰차고 다녔다. 바람 부는 소리가 유독 날카롭다거나,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집 안에만 머물렀다. 설령 바깥에 있다가도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면 어김없이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추위가 가장 심해지는 시기에 설원은 그림자마저 자취를 감추는 백색만이 존재하는 공간으로 변했다. 몰인정한 겨울은 자신의 영토에 이방인이 발을 들이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

 

고독한 설원을 순찰하던 눈송이는 침입자를 발견하자 머뭇거렸다.

그야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는 날아다니는 새나, 산짐승들도 설원에 접근하지 않는다. 본능적으로 알고 있던 것이다.

침입자를 발견한 이상 겨울에게 보고해야 한다. 자신이 비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은 눈송이는 위로 올라가는 바람에 올라탔다.

올라가기 직전에 눈송이는 마지막으로 감히 겨울의 영토를 침범한 침입자를 눈에 담았다.

구름의 시점에서 내려다본 여행자는 새하얀 도화지에 찍힌 검은 자국처럼 보였다.

 

언덕의 꼭대기에 도달한 여행자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헛수고다. 몇 번을 둘러봐도 보일 리가 없다. 쉴새없이 얼굴에 부딪혀 오는 눈송이가 앞을 가린다.

바람에 두건이 벗겨지려고 하자 여행자는 손을 뻗어 두건을 붙잡았다. 망토 밑에서 나타난 손은 흉터로 가득했다. 여행자가 살아온 삶에 대해 말해주듯이, 거친 상처로 가득한 손이었다.

여행자는 한동안 망부석처럼 서 있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점점이 남은 발자국만 방금 누군가 이곳을 지나갔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여행자가 떠나자마자 겨울이 순록 마차를 타고 언덕에 도착했다.

간발의 차였다. 침입자를 놓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겨울은 대신 언덕에게 화풀이를 했다. 거친 북풍이 언덕을 휩쓸었다. 언덕은 다시 손대지 않은 자연으로, 무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침입자의 흔적을 깨끗하게 지워버린 겨울은 눈마차를 몰고 설원을 가로질러 궁전으로 돌아갔다.

 

눈보라의 기세가 약간이나마 꺾인 것은 여행자가 숲의 경계에 다다랐을 즈음이었다.

설원이 순결한 흰 도화지라면 지금은 갈색 유화 물감으로 땅을 표현하고 그 위에 앙상한 선을 여럿 그려 나무를 표현한 듯한 광경이다. 눈의 무게 때문에 가지들은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아래를 향해 휘어져 있었다.

 

먼저 주변에 보는 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여행자는 두건을 벗었다.

슬픔이 내려앉은 여성의 얼굴이 두건 밑에서 나타났다. 얇은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고, 날카로운 눈매가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한 점이 몇 가지가 있었다. 망토 밑으로는 검은색 꼬리가 삐죽 튀어나와 있고, 이마에도 희미하지만 작은 뿔이 나 있었다.

모두 인간으로 변장한 용족에게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흔적들이었다.

 

나락의 세실리아는 망토를 ** 그 위에 쌓인 눈을 털어냈다. 다시 망토를 쓰자 눈 앞에 숲의 입구가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었다.

문득 가진 음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확인해보자 아무리 아껴도 이틀이면 바닥을 드러낼 정도의 양 밖에 없었다. 이 뒤에는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사냥을 나서야 했다.

짐승들마저 추위에 쫓겨난 이곳에서 말이다.

 

세실리아는 가까운 곳에 마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설원을 가로질러 이곳까지 찾아온 것은 여신교의 교회가 있는 마을을 찾기 위해서였다.

총본산으로 알려진 이제라가 있는 남쪽의 리타니아도 아니고 이 척박한 에우레카 대륙에서 말이다.

세실리아가 움직이려는 찰나, 팔에서 느껴지는 찌를 듯한 격통에 몸이 움찔했다.

서둘러 마을을 찾아야 한다. 저주가 손쓸 새 없이 악화되기 전에.

 

숲은 설원과 다르게 바람이 불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지역의 모든 바람이 설원으로 몰려든 것 같았다. 숨을 마시자 차고 맑은 공기가 느껴진다.

미칠 듯이 새하얗다. 새하얀 만큼 또한 숲은 조용했다. 가끔씩 눈을 밟는 소리만 들렸다.

나머지는 정적이었다.

정적이 깨진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인기척과 함께 커다란 그림자가 몇십 걸음 정도 떨어진 나무 그늘 밑에서 나타났다.

세실리아는 다른 이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손을 목 뒤쪽으로 가져가 여차하면 등에 매달아 둔 무기를 뽑아들 준비를 했다.

때마침 그림자도 세실리아를 발견했는지 방향을 꺾었다. 그늘을 벗어나자 그림자의 정체가 드러났다.

 

인간 사냥꾼이었다.

거대한 덩치가 수인이나 몬스터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켰지만 확실한 인간족이었다.

사냥꾼은 숲에서 다른 누군가를 마주친 것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근처에서 얼굴을 본 기억은 없는데, 혹시 여행자인가?"

 

사냥꾼은 투박한 생김새에 위에는 가죽 옷을 걸쳤다. 두껍게 기른 수염은 작은 동물 가죽을 입가에 매달아 놓은 것 같았다.

허리춤에는 두꺼운 칼을 찼고 등에는 길쭉한 막대기를 매고 있다. 평소에 손질을 잘 하는지 빛이 반사될 정도로 표면이 반짝거린다.

저 막대기에 대해 알고 있다. 분명 총이라고 불리는 물건이었다. 인간의 무기로, 상대방을 향해 겨냥한 다음 막대기에 불을 붙이면 막대기의 끝에서 강철 구슬이 번개처럼 날아갔다.

사용하는 모습을 본 적도 있었다. 이전에 설원 근처에서 마주친 인간 사냥꾼 무리와 함께 우두머리 몬스터를 사냥할 때였다. 그때는 우두머리를 상대로 별 힘을 쓰지 못해서 세실리아가 직접 숨통을 끊어야만 했다.

하지만 일반적인 동물을 사냥할 때나 인간들끼리 싸울 때에는 강한 힘을 발휘한다고 한다.

세실리아는 사냥꾼이 자기에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렇습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처럼 사냥꾼의 입가가 들썩였지만 세실리아의 등에 있는 창을 보자 곧 잠잠해졌다. 여러모로 보는 이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창이다. 사냥꾼의 얼굴에 경악과 감탄이 절반씩 섞인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태어나서 저렇게 큰 창은 처음 볼 것이다.

무기에는 보통 만드는 이의 미적 감각이 어느 정도는 반영이 되기 마련이지만 이 창은 본연의 목적에만 충실했다.

 

검은 돌을 깎아서 만든 웬만한 타워실드(직사각형의 방패)보다 거대한 거친 날의 아래쪽을 가시덩굴 모양 장식이 휘감고 있었다. 그 밑에는 손잡이가 달려있지만, 다른 부위가 주는 인상 때문에 그렇게 부각되지는 않았다.

평범한 사람은 들어올리는 것도 불가능해 보인다. 사냥꾼 자신도 저것을 휘두를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

 

사냥꾼의 말투가 방금 전보다 더 조심스러워졌다. 어쩌면 등에 맨 총을 뽑을까 고민하는 것 같았다.

 

"혹시 어디서 왔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저 북쪽에서 왔습니다."

 

"북쪽에서? 이 날씨에? ** 짓이 따로 없군."

 

세실리아는 부정하지 않았다.

세실리아의 말에 숨어있는 사실을 깨닫자 사냥꾼의 언성이 높아졌다.

 

"설마 설원을 가로지른 건가?"

 

세실리아는 “오늘 아침으로 말린 사슴 고기를 먹었습니다.” 나 “날씨가 참 좋지 않습니까?”라는 말을 할 때처럼 일상적인 대화를 하듯이 말했지만 사실을 따지자면 방금 세실리아가 한 말은 상식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아무리 숙련된 사냥꾼이라도 눈보라가 거센 시기에는 설원에 접근하는 것을 꺼린다. 함부로 바깥에 나갔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이웃이 얼마나 많은가? 호기롭게 사냥을 나섰다가 눈보라 속에서 목숨을 잃은 사냥꾼이 몇 명인가?

사실 사냥꾼도 날씨가 한풀 꺾였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숲에 있는 자신의 오두막을 나온 것이었다.

 

"그 말이 허풍이 아니라면 정말로 대단한 일을 했군. 이번 눈보라는 마을 하나를 흔적도 없이 묻어버릴 수 있을 만큼 강했어. 등 뒤에 창을 보면 거짓말은 아닌 것 같지만 아무리 그래도 설원은 연약한 여자가 혼자서 여행할 만한 곳은 아니네. 특히 이런 날씨에는."

 

“...감사합니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절대로 잘했다는 것은 아니네. 이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야.”

 

“…”

 

사냥꾼의 오지랖은 퍽 넓었다.

세실리아는 진심 어린 충고 속에 담긴 모순에 대해 굳이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첫 번째로 그녀는 인간의 기준에서 전혀 연약하지 않았다. 두 번째로 애초부터 그녀는 인간이 아니다.

 

"저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습니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다.

사냥꾼은 그 주제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럼 상관은 없겠군. 그나저나 숲에서 몸집이 집채만 한 설원 곰을 본 적 있는가? 아니면 흔적이라도. 나무 줄기에서 사람 키보다 높은 부분에 발톱으로 긁은 자국이 있었을 거야. 그 녀석이 자기 영역을 표시할 때 남긴 흔적이지."

 

"따로 없습니다.”

 

“그럼 다행이군. 만약 곰을 마주치면 싸울 생각은 말게. 무기를 보니 싸우는 법은 알겠지만 워낙 위험한 녀석이라… 해를 입을까 걱정되어 말하는 소리요.”

 

“걱정은 감사합니다만…”

 

사냥꾼은 세실리아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이 숲의 폭군이나 다름없는 놈이야. 그 놈에게 마을 사람들이 여럿 목숨을 잃었네. 게다가 얼마 전에는 하나뿐인 동료였던 녀석도 직접 손으로 묻어줘야 했어.”

 

비장한 표정이다.

세실리아는 저 표정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죽음을 각오한 자의 얼굴이다.

그는 이 사냥에 진심으로 임하고 있었다. 자기가 역으로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목숨을 걸고 직접 설원 곰의 사냥에 나섰다.

세실리아는 방금 사냥꾼의 말에서 중요한 정보를 놓쳤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혹시 이 근처에 여신교의 교회가 있는 마을이 있습니까?”

 

“마을에 여신교의 교회가 있긴 하지. 사제님 한 명만 있는 작은 교회일 뿐이지만.”

 

세실리아에게 마을로 가는 법을 알려준 사냥꾼은 마을로 향한다는 세실리아의 말에 부탁을 해왔다.

 

“그러면 마을에 가는 김에 부탁 하나만 들어주게. 큰 사슴 잡화점의 브렌다에게 늦어도 일주일 뒤에는 꼭 돌아가겠다고 전해줄 수 있겠나? 큰 사슴 잡화점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야. 마을 광장과 가까우니까. 여신교의 교회도 그 근처에 있네.”

 

세실리아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사냥꾼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고맙네. 당신이 마을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여신께 기도하지. 다시 당부하지만 숲에서 설원 곰을 만나면 반드시 싸우지 말고 도망치게. 흰색 가죽에 한쪽 눈가에 흉터가 길게 나 있으니 구별하기는 쉬울 거야.”

 

이 말을 끝으로 세실리아와 사냥꾼은 헤어져 서로 갈 길을 갔다.

 

설원의 밤은 빠르게 찾아온다.

붉은 태양이 지평선 밑으로 꺼지자 보랏빛으로 물들었던 하늘은 금방 검은 고체처럼 굳어버렸다.

어둠이 가지 위에 까마귀처럼 내려앉을 때에도 마을을 찾지 못한 세실리아는 무리하게 이동하는 것보다는 밤을 보낼만한 장소를 찾기로 했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해가 완전히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기 전에 빈 동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안을 살펴보자 다행히도 바람과 눈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은 곳이었다.

세실리아는 동굴 입구에서 몇 십 걸음을 들어간 지점에 자리를 잡은 다음 짐을 풀었다.

바람이 닿지 않으려면 안쪽으로 더 들어가는 편이 좋겠지만 동굴의 끝까지 가본 끝에 세실리아는 이쯤에서 밤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가능하면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다시 눈발이 날리기 시작해서 그럴 수도 없었다.

 

예전부터 내려오는 설화에 따르면 겨울에 아침이 늦게 오는 것은 겨울이 연인인 밤을 보내고 싶지 않아 망토로 태양을 가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밤이 빠르게 찾아오는 것은 밤이 겨울이 연인을 맞이하기 위해 깔아둔 하얀 융단길로 오기 때문이라지만...

 

감상에 빠져 있을 틈은 없었던 세실리아는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냈다. 더 늦기 전에 밤을 샐 준비를 마쳐야 했다. 미리 챙겨온 마른 나뭇가지를 바닥에 쏟은 다음 어둠 속에서 간신히 부싯돌을 찾아 불을 붙이자 주황색 불꽃이 일었다.

불은 사람에게 밤을 보낼 수 있는 온기를 준다. 야생동물을 쫓아내 주는 것은 덤이었다.

마침내 밤이 찾아왔다.

 

가장 원초적인 신앙 행위로 얻은 제단 위에서 작은 불은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싸늘한 공기가 밀려와 순간 움츠려 들었다. 이런 장소는 힘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불은 이전보다 조심스러워진 태도로 공기의 흐름에 맞추어 몸을 흔들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불빛이 닿는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색을 빼앗긴 것처럼 창백하다. 저 멀리 보이는 눈보라의 꼬리가 불안감에 쐐기를 박았다. 말로만 듣던 설산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자 순간 불길이 파래졌다.

옆을 보자 자신을 불러낸 신도가 동굴 바깥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나 자기가 쓸모가 없으면 불을 꺼버리지 않을까 싶어 불은 조심스럽게 신도의 의도를 살폈다. 신도는 불에게 관심이 없었다. 또한 무리한 요구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불은 자신이 있는 일, 즉 무언가를 태우거나 사르는 대신 장작 위에 가만히 앉아있기로 했다.

그것은 세실리아가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한순간 먼 곳에서 터지는 듯한 큰 소리가 났지만 곧 바람 소리에 삼켜져서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밤이 되자 칠흑 같은 어둠이 세상을 삼켰지만 동굴 안쪽은 흔들리는 모닥불 덕분에 불빛과 색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둥글게 휘어진 동굴 벽이 차가운 외부와는 정반대의 색으로 물들었다.

그 색은 밝은 주황색, 설원에서 가장 보기 힘든 색이었다.

 

사냥꾼의 말대로면 내일 즈음에는 마을에 도착할 것이다.

마을에 가면 할 일이 많았다. 가장 먼저 교회에서 사제를 만나야 한다.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물품도 보충해야 한다. 참, 사냥꾼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했다.

 

어둠 속에서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울었다.

마음 속 깊게 묻어둔 죄책감을 손톱으로 파헤쳐 꺼내려는 듯이 끊임없이 울어 댄다.

바람이 방향을 바꾸어 동굴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불이 당장이라도 꺼질 것만 같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깜부기불 정도는 남겨두어야 했기에 세실리아는 불을 뒤집기 위해 몸을 뒤척였다.

자세를 바꾸자 그동안 망토 밑에 가려져 있던 반신이 드러났다.

 

어깨에서 시작해 팔 전체가 흑요석처럼 검게 물들어 있었다. 괴물의 그것처럼 흉측한 몰골이다. 

마녀가 세실리아에게 남긴 저주의 흔적이 빛을 받아 불길한 빛으로 반짝인다.

동굴 벽에 투영된 그림자가 불안하게 요동친다.

만약 그 날을 운명의 달력에서 지울 수만 있었다면 세실리아는 기꺼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복수를 하고 싶니? 그럼 어디 한 번 살아서 나를 찾아오렴. 물론 할 수 있다면 말야."

 

깊이 눌러쓴 두건 밑으로 한 쌍의 눈동자가 뱀처럼 섬뜩하게 번쩍인다.

주홍색 눈동자가 쓰러진 세실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이 장면은 그녀의 기억 속에 생생히 박혔다.

 

세실리아는 몸을 뒤덮은 저주의 흔적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얼어붙은 돌을 만질 때와 같이 찌르는 듯한 차가움이 손끝에서 느껴지자 반사적으로 손을 떼었다. 손바닥을 쳐다보았지만 멀쩡하다. 만지는 것만으로 저주가 옮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하지만 알고 있다. 멀지 않아 이 손도 다른 쪽 손과 같이 저주로 뒤덮일 것이라는 것을.

탐욕스럽게 몸집을 서서히 키우고 있는 저주는 세실리아의 몸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목숨까지 요구해 왔다.

 

안에서 감정이 검은 두 갈래 연기가 되어 피어오른다.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아직도 복수를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자괴감으로.

죄책감이 울고 있다. 동굴 바깥에서 우는 밴시처럼 울부짖는다.

어차피 정해진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면 잠깐 몸이 편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날 밤, 세실리아는 악몽을 꾸었다.

 

긴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세실라아를 고향의 정겨운 모습이 맞이해 주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이 눈을 깜빡이거나 숨을 쉬는 것처럼 익숙하다. 태어나고, 사랑하는 이들이 있고, 삶의 전부가 살아 숨 쉬는 곳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동족들을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세실리아는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귀를 기울여봐도 말이다. 기이하게까지 느껴지는 침묵이다.

이상하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나 그 흔한 바람에 가지가 흔들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온 세상이 적막에 집어삼켜진 것만 같았다. 걸을 때마다 불안한 감정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바짝 마른 입술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여느 때처럼 쓸데없는 걱정이야.”

 

하지만 방금 한 말도 무색하게, 세실리아는 어느새 있는 힘껏 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음에도. 하지만 불길한 이 느낌은 이미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선고를 내린 지 오래였다.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속으로 간절히 기도하지만 이 기도가 닿았는지는 알 수 없다.

어디선가 귀를 찢는 듯한 종 소리가 들려온다.

데엥. 데엥. 데엥.

 

마을 입구에 도달한 세실리아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운명은 어두운 망상이나 내놓을 법한 가장 끔찍한 결과를 내놓았다.

불타는 마을에 검은 석상이 가득하다. 새와 동물, 그리고 그녀의 동족까지.

석상의 표정은 하나뿐이다. 그것은 극심한 공포였다.

죽음으로 빚어낸 광경을 보고 있으면 정적 속에서도 참혹했던 당시의 상황이 재현되었다.

세실리아의 비명이 침묵을 뚫고 울려 퍼졌다.

 

잠에서 깬 세실리아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싸늘하다.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자 얼어붙은 땀방울이 만져졌다. 바깥에는 이미 해가 떠 있었다. 눈에 반사된 아침 햇빛이 눈을 따갑게 했다.

모닥불은 따스함을 잃고 회색 재가 된 지 오래였다. 세실리아는 잿더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가 보고 있는 동안 동굴로 들어온 바람이 잿더미를 흩어놓았다.

 

세실리아는 짐을 챙기고 나왔다.

동굴을 나온 세실리아의 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거대한 설원 곰이 세실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융단처럼 고운 흰 털에, 한 쪽 눈에는 흉터가 나 있었다. 사냥꾼이 어제 그렇게나 경고했던 설원 곰이었다.

그리고 또 세실리아가 머물렀던 동굴의 원주인이기도 했다. 동굴 끝에는 동물의 뼈로 가득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정체를 상상하기 꺼려지는 모양의 뼈 또한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세실리아가 동굴에 찾아왔던 순간 마침 동굴의 주인은 자리를 비우고 있었던 것이다.

 

밤새 사냥을 한 것인지 설원 곰의 입가에 얼어붙은 피가 묻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얼굴에 있는 흉터 말고도 몸에는 생긴지 오래되지 않은 큰 상처가 몇 개나 나 있었다.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눈처럼 하얀 가죽에 얼룩을 남겼다.

분명 양측이 목숨을 건 혈투였겠지. 하지만 승리는 설원 곰에게 돌아갔고 패배는 곧 죽음을 의미했다.

설원의 규칙은 냉혹했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고 약하면 죽는다.

 

공기 중에 떠도는 미약한 혈향을 맡자 비릿함이 코를 찌른다.

세실리아는 뒤에 매어둔 창을 꺼내 손에 쥐었다.

적어도 사냥꾼의 복수 정도는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그에게 최소한의 위로가 될 수 있기를.

상처를 입은 숲의 왕이 으르렁거리며 울부짖자 나뭇가지에 쌓여있던 눈이 떨어졌다.

 

세실리아와 설원 곰은 동시에 땅을 박찬 다음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승자의 일격이 상대방의 목숨을 끊고 패자의 뜨거운 피가 쏟아져 새하얀 땅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팬소설 #팬픽 #세실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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