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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7팬픽 : 파스투스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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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피소드 2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4



'규칙'

퍼랜드를 정의하는 것에는 이 짧은 단어 하나면 충분할 것이다. 그만큼 퍼랜드는 엄격한 관료주의 국가였다.

대부분의 퍼랜드 시민은 엄격한 규칙에 매여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은 허가 없이 몰래 금서관리구역으로 들어가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고발하는 양심과 규칙을 합리화라는 마약으로 무감각하게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제풀에 지린 도적처럼 은밀히 움직였다. 아니,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고 있으니 이러는 것이 정상이긴 하지만 말이다.

역시 이런 일을 하자고 말한 점에서 내 친구는 정상인이 아니다.


말 못할 과정들을 거치고 난 뒤에 들어간 금서관리구역은 한마디로 깨끗했다. 온 곳에 어둠이 짙게 깔려있고 구역으로 나뉘어 질서정연하게 정렬된 책장마다 음산한 빛을 내는 희미한 청색 마법등이 걸려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우리에게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금지된 노래를 흥얼거리는 수만개의 책들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 숨을 깊게 들이쉬자 오래된 책 냄새와 먼지냄새가 났다.

금서구역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지하의 강한 냉기가 옷 속으로 파고들어왔다. 관리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다핸히  볼 일도 없는 곳에 사람을 배치하는 멍청한 곳이 아니었다.

앞을 보자 공중에 걸려있는 금속판에 글귀가 하나 적혀 있었다.



‘감히 우리는 세상을 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앎은 인간의 무지함을 최악의 형태로 비틀어 놓은 것이 아닐까.’


우리는 한동안 서서 문구를 쳐다보았다. 친구가 내게 말을 걸었다.

“저 문구 기억나?”

“당연히 기억하지. 의문문으로 끝나는 것은 위치헤이븐 어쩌구.”

“그 교수님 수업 진짜로 재미없었잖아.”

“그랬지.”

저 문구를 보자니 대학시절 금서학 강의에서 낙제점을 맞았던 기억이 떠올라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잠깐 사이에 친구는 책장 사이로 들어가고 있었다. 뒤쳐지면 다시 찾기 힘들 것 같아 나도 멀어져가는 친구의 뒤를 쫓아 책장 사이로 들어갔다.

수많은 금서들이 다가오고 점점 멀어져간다. 말없이 꽂혀있는 책들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금서고에는 우리의 발소리만이 반사되어 더욱 크게 들렸다. 이곳에 갇혀있을 뿐인 죄수인 그들이 우리를 환영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들어온 책들 중에 죄있는 책 하나 없겠지만은 적어도 그들에게는 이곳에 갇힐 만한 이유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불온 서적, 악마의 책, 재앙을 부르는 주문들, 저주, 그리고 이성의 세계 안에 갇혀있는 우리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존재들의 편린을 묘사한 책들까지… 이 지식들이 한낮의 광명 속에 낱낱이 밝혀지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사람들은 여전히 한낮에 빛을 볼 수 있을까?


“그래. 찾았어. 이 근처야.”

친구는 한 지점에서 멈춰서더니 곧바로 책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이 책이 어디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던 것 같았다. 어떻게 알았던 걸까. 책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기쁨으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순간 그의 모습이 미끼에 물린 물고기처럼 보였지만 차마 만류할 수 없었다. 지금 발을 빼기에는 이미 우리는 너무 깊숙히 들어왔고 또 그의 눈은 이성 안에 존재하는 것이 한없이 시시한 것처럼, 덜익어 떫은 과일처럼, 너무 먹어 물린 음식처럼 느껴져 그 이상의 것을 찾아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반면에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를 넘은 미지의 것들은 빨갛게 익은 사과처럼 보일 것이다. 한 입 베어물면 인생의 모든 갈증과 허망함, 공허함을 모두 채워줄 것 같은 붉은 금단의 과실처럼.

혹시, 우리에게 닥쳐올 불길한 운명이 우리를 이 길로 안내하는 게 아닐까.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나는 그 생각을 곧바로 부정했다. 운명은 무슨, 모든 것은 사람의 행동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신따위는 없다.

건물 지하 깊숙한 곳이라 새소리가 들려올 리 없는 이곳에 올빼미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어릴적에 할머니는 줄곧 말하셨다. 올빼미의 울음소리는 죽음을 상징하는 밤의 불길한 소리니 올빼미 우는 소리를 들었다면 분명 가까운 사람이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나는 그 소리를 무시했다. 내 지나친 상상력 때문에 들린 소리일 것이다. 자신의 주제를 모르고 지나치게 비대해진 상상력이 이런 환청을 듣게 하는 거다.

"그래. 찾았다."

친구는 끝없는 책장의 길 한가운데에서 붉은 표지를 가진 한 권의 책을 꺼내들었다. 그 행동은 내게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감을 가져다주었다. 집어넣으려고 노력해도 그것은 찢어진 곰인형에서 튀어나온 솜처럼 없어지지 않았다.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그저 친구의 곁에 다가가 봉인이 풀린 경계의 비밀을 함께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그 책이야?"

"맞아. 이거야. 같이 보자고."

푸른 조명을 받은 책은 그 색이 섞여 더욱 섬뜩하게 보였다. 제목이 적혀 있었다.

'경계 너머의 세상'

표지 겉면에는 친절하게도 이 책이 금서로 지정된 이유가 붙여져있었다.



'읽는 시민들에게 불안감을 형성하고 사회에 해를 끼치는 도서로 해당 칙령에 의해 금서로 지정함.

퍼랜드 칙령 21 - 220'



우리는 서둘러 그 책의 표지를 넘겨보았다. 동시에 이성의 차원 너머로 이어지는 통로의 문을 열어젖혔다. 낡은 종이 특유의 푸석푸석함이 느껴지는 그것은 책이라기보다는 누군가의 일기에 가까웠다.

그 책을 적은 사람은 사회에서 광인으로 낙인 찍힌 것 같았다. 글 전반에 의미와 무의미가 모순을 이루는 쌍으로 섞여 있었고 그 둘은 나누이지 않고 하나가 되어 그가 본 진실을, 오히려 모순적으로 묘사한 덕분에 더욱 뚜렷하게 전달해주고 있었다.

일단 우리는 해석할 수 있는 부분만 빠르게 읽어보았다.



'밤. 그것도 루니리스가 짙은 구름 속으로 숨어버린 가장 불길한 밤에, 별들이 어둠에 먹혀버린 저주받은 밤에 나는 내게 속삭여오는 그 목소리를 들었다. 목소리는 내게 말하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는 듯이 높은 음으로 울다가도 갑자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는 했다. 하지만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그것이 내게 꾸준히 말을 걸고 있다는 사실은 명확했다.

나는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짐작할 수도 없었다. 여신교가 말하는 마신도 아니다. 그것의 소리는 얼마 전에 이미 끝났다. 들려오는 상처 속 승리의 함성.

봉인된 것이 목소리를 들려올 리가 없다. 게다가 이 목소리는 그것보다 훨씬 깊고, 축축하고 어두운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것이다.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밤을 저주받은 것으로 만드는 존재 중 하나가, 낮과 밤을 선과 악으로 나누게 만든 존재가 이 속삭임에 관여하고 있다. 게다가 이 목소리는 다른 차원에서 들려오는 것이다.

나는 알고있다. 이것은 뒤틀림 그 자체다. 안전한 이곳 안에서 안주하는 우리들은 우리를 지켜주는 장막 너머에서 일어나는 가증스러운 일들을 알지 못한다. 멸망이라고 부르고, 죽음으로도 불리며 우리가 형언할 수 없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속삭임이 들린다. 내 귀는 알아들을 수 없고 또 말할 수도 없는 속삭임이 끓는 지옥불처럼 타오르다. 마신도 아니다. 마족도, 귀신이나 용이나 몬스터나 그런 하찮은 것들이 아니다. 환상 속에서 불경한 빛이 사도니아 전역을 비추고 있다. 동시에 더없이 신성한 그것은 보라색으로 환하게 빛나지만 밤하늘보다 훨씬 시커멓고 어둡다.'

여기서 글은 잠시 끊겼다. 그 뒤로는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갈겨쓴 글씨밖에 없어 몇 장을 더 넘겼다. 친구가 종이를 넘기는 순간 나는 똑똑히 보았다. 넘겨진 종이 사이로 파스투스의 문양이 보였다!

문양은 곧 지나갔지만 방금 읽은 이해못할 말과 합쳐져 내 머리 속을 복잡하게 채웠다. 책장을 넘길수록 내용이 점점 이상해지고 있었다.

친구는 곧바로 알아볼 수 있는 부분을 찾아 읽기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그 날로부터 몇 달이 지났다. 이제는 내것이 아닌 환상이 침범해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것은 내가 원하지 않는 미래를 계속해서 보이고 있다. 대륙을 좀먹는 사멸의 땅. 모든 생명을 부정하는 멸망의 모습이 잠에 빠진 내 눈앞에 일렁인다. 땅이 원래 가지고 있던 색채와 아무리 거친 곳에서도 싹을 틔우는 역동적인 생명의 힘은 빼앗기고 잿빛만이 존재하는 시커먼 죽음의 땅으로 변해버린 그 말로에서 빼앗긴 생명의 힘은 과연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젯밤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언제 생긴건지 알지 못하는 미지의 기억이 섞여들어온 탓에  요즘들어 두통과 메스꺼움이 심해졌다.수면제를 먹고 간신히 잠을 청한 나는 다시 사멸의 땅으로 날아갔다. 그곳에는 기묘한 문양이 새겨진 일렁이는 문이 있었다. 그 문은 어둠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호기심에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보았다. 그곳에는 아무리 신을 모욕하는 이라도 신에게 구원을 부르짖을만한 광경이 담겨있었다. 비명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고통받는, 생전의 죄악으로 인해 그 죗값을 피로 채우는 불쌍한 영혼들의 울부짖음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그 아픔이 점점 내 안을 가득 채워가자 고통이 심해졌다. 나는 그 슬픈 소리에 연민으로 비틀어지는 내 마음을 애써 다스리며 나아갔다. 수많은 산과 강을 넘고 거대한 대양 위를 날아가 끝없는 사막, 고대의 도시를 넘었다. 무수한 시간동안 무수한 차원을 돌아다녔다. 그 여정은 내가 상상치도 못했던 사실들을 알려주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일렁임으로 가득한 공간까지 발을 딛었다. 그러다가 '알지 못하는 존재'와 마주쳤다. 그것은 감히 인간의 묘사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것의 머리와 몸통은 구별이 불가능했다. 몸은 점액질로 이루어진 원통형이었다. 그 안에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미지의 기관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입은 앞과 뒤에 하나씩 툭 튀어나와 있었고 그 가운데 길고 가는 혀가 낼름거리며 탐욕스럽게 혀를 다시는 듯 했다. 그리고 얇은 바늘같이 가는 다리는 땅을 짚으면서 걷고 있었는데 그 걷는 것이 절뚝거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몸 전체에 타는 듯이 붉은 눈이 매달려 생명에 대한 증오를 가득 담은 시선으로 이곳저곳을 휘릭휘릭 돌려보고 있었다. 심지어 그것은 내 앞으로 오고 있었다! 역겨운 그것의 인상에 나는 한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그것은 방향을 바꾸기는 커녕 속도가 더 빨라지는 것 같았다. 나는 경악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괴한 그 모습이 존재하다니! 하지만 '알지 못하는 존재'는 나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그것의 멀어져가는 모습을 보지 않고서는 불안함에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아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절대 그래서는 안되었었다.

그것의 뒷모습은 영락없는 사람의 형태였다. 입고 있는 옷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깔끔한 모양이었고 분명히 사람이었다. 갈색의 피부에 긴 머리카락이 내려왔고 머리에는 이상한 두 뿔이, 이마에는 흉측한 다섯 눈이 달려 있었다. 나는 목소리를 내어 그자를 부르려 했지만 내 목소리가 나오기도 전에 그것은 다시 '알지 못하는 존재'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나는 방금 전에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동안 가리워 보이지 않던 세계의 진실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것은 '알지 못하는 존재였다.' 동시에 사람이었다. 내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저 형언못할 괴물은 사실 사람인가? 아니면 이 괴상한 곳이 이렇게 만드는 것인가? 터져나오는 괴로움에 저절로 몸서리가 쳐진다.

나는 방금 알아낸 사실에 경악했다. 카오스게이트, 천천히 기어오는 멸망. 혼돈의 공간에서 본 환상. 나는 무의식적으로 친구를 쳐다보았다. 친구는 그의 얼굴 가득 땀방울이 맺힌 채 핏줄이 선 눈으로 책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앞으로 몇 장 남지 않았다. 게다가 알 수 없는 부분이 다수라 다행히도 대충 넘기자 나온 것이 마지막이다.

다행히도…



"이제는 그들의 이름이 들려온다. '파스투스' … '네뷸라!' 일식이 다가왔다. 특히나 저주받은 날이다. 속삭임이 눈 앞에서 변해간다. 명백히 보인다 저주받은 날들이! 속삭임이 별이 되었다. 내게 미래를 보였다! 연약한 유리의 기사! 신을 죽인 자! 그가 그릇이 되었다. 안된다. 막아야한다. 사도니아가 피로 물든다. 그것은 시작이다! 우리가 문명이라 부를만한 것은 더이상 남아있지 않는다.

멸망이 형언못할 기이한 빛깔의 물결이 되어 다른 대륙을 덮친다. 먼저 리타니아다. 그 다음 에우레카와 저 광활한 엘리시아와 신비에 휩싸여있는 동방까지 미친다. 모든 땅이 암흑으로, 바다가 피로 물든다. 더 이상 해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두운 별에 먹혀버렸다. 사람, 늪과 돌, 태양 종족, 저 저급하게 떠드는 하찮은 놀, 리타니아에 사는 고귀한 엘프, 북방에 산다고 전해지는 지고의 용족과 생명의 이치를 벗어나 움직인다 전해지는 자동인형들도 모두 먹혀버렸다! 이 땅에 남은 생명은 단 하나도 없다! 생명의 싹은 짓밟혀 어둠에 물들었다.

네뷸라! 우리의 앞이 오 보인다! 네뷸라! 피다! 피!"



네뷸라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를 알진 못했지만 읽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명백한 악의에 소름이 끼쳤다. 그 뒤에 무언가가 적혀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책장을 넘겨 그 장을 펼쳐 보았고 그제서야 우리가 경계심 없이 이 금서를 건들었던 것이 얼마나 잘못된, 멍청한 행동인지 깨달았다.



종이를 넘기자 그곳에는 이해하지 못할 그림이 두 장 정도 그려져 있었다. 아니 한 장은 거칠게 찢어져 있어 사실상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한 장 뿐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한 장을 찢어낸 그 덕분에 우리가 생명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남은 한 장의 그림을 보자마자 심연에서 기어나온 시커먼 공포가 우리를 휩쓸었기 때문이었다.



감당치 못할 순간에 선 나는 연약한 이성이 정신을 잃고 이 들어오는 지식의 격류를 막아주길 그렇게나 바랬던 적이 없을 만큼 바랬지만 잔인하게도 경계의 바깥에 선 내 의식은 그 어느때보다 생생히 깨어있었다.



이성의 장막을 찢어버리고 짓쳐 들어오는 정체 모를 악의가 우리를 먹어 치운다. 세상은 우리 생각처럼  안전하지 않았다. 우리가 알아버린 저주받은 사실. 지금까지 발딛으며 살아온 사실의 발판이 무너지고 그 아래에 펼쳐진 심연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지금까지 잡으면서 살아온 것은 덧없는 환영이었나? 지금은 내 몸을 섬뜩하게 채우는 외신에 대한 두려움만이 가장 확실한 사실이 되었다.

닥쳐온 두려움은 신을 믿는 자가 믿었던 신을 불태우고, 무신론자가 신을 갈구하게 만들었다.

모르는 것이 축복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나는 사시나무 떨듯이 떠는 몸을 부여잡으며 친구를 바라보았지만 친구는 이미 창백하게 변해 버렸다.

푸른 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이 시체보다 더욱 창백하게 보였다.

그림 너머로 느껴졌다. 우리는 파스투스의 모습을 보았고 그도 우리의 존재를 눈치챘다.



그렇게 경계 바깥의 모습을 두 눈에 새긴 우리는 다시는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5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감히 바깥에 나갈 수 없던 나는 폐인처럼 바깥과 모든 연락을 끊은 채 자리에 웅크려 두려움에 떨기만 했다.

한시도 쉬지 않고 돌아보아야 했다. 언제 그것이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와 나를 죽이려 들지 모른다. 그림자를 만드는 것들은 모두 치워버리거나, 부숴버렸다. 잠드는 것은 바라지도 못했다. 눈을 감으면 흐릿한 어둠 속에서 끔찍한 미래가 엿보였다.

한시도 눈을 감지 못한 채 눈앞에서 펼쳐지는 환상에 몸부림쳤다. 

그 시간동안 괴로움에 시달린 끝에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가 세계라고 부르는 이곳은 사실 그들의 손짓 한번에 우그러질 싸구려 연극 위 무대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감히 외치는 진리는 사방이 베일로 감싸인 방에서 노는 아이의 장난질에 불과했다는 것을.



이따금 베일에 경계의 바깥에 도사리고 있는 존재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는 했지만 방 안의 아이들은 그것을 별 것 아닌 장난이라며 치부한다. 그 중에 세계의 진실을 알려고 하는 자들은 자신의 앞을 가리고 있던 베일을 들추고 눈 앞에 펼쳐진 세계의 본모습을 응시하지만 그들은 진실을 아는 대가로 공허만이 있는 운명의 격류에 스스로를 내팽개쳐야만 했다.



우리에게 구원 따위는 없었다. 다 부질없다. 덧없다.

내가 본 것에 대해서 기록을 남겨야 할 필요성을 느꼈던 나는 펜을 들자마자 놓고 머리를 감싸안은 다음 흐느꼈다. 미약한 감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퍼랜드, 사도니아가 다가오는 멸망의 앞에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도 없었다. 오직 눈 앞에 다가올 파멸을 무력하게 기다려야 했다.

어느 날, 아침이었을까? 한밤중이었을까? 이성이 마비되어버려 시간 개념마저 잊어버린 나는 결코 가질 수 없을 영원한 평안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가쁘게 숨만 내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문을 쾅 쾅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음에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섞여 들렸다. 저주받은 내 이름이.

나는 내심 끝을 바라며 드디어 도착한 방문객에게 순순히 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기대한 존재가 아니었다. 흐릿한 형체로 기억에 남아있는 주황색 머리에 깔끔하게 생긴 남성이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친구가 끔찍한 방식으로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내게 전했다.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문앞에 서있는 그를 밀쳐내고 서둘러 밖으로 뛰쳐나갔다. 방금까지도 죽어가던 내 몸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친구가 어디서 죽었는지도 듣지 않았지만 나는 그 장소가 어딘지 가닥이 잡혀왔다.



그렇게 나는 드디어 끝이 다가왔다는 환희와 내게 닥쳐올 끔찍한 미래에 대한 공포 사이에서 고통받는동안 그 장소에 도착했다. 시간은 늦은 밤이었다. 시체는 천에 싸여있었고 광장을 비추는 마법등은 오히려 내 눈만 따갑게 만들었다.

그리고 친구가 마지막까지 있었던 자리에는... 엄청난 양의 피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그 앞에는...오, 지난 일주일간 친구의 공포가 어떻게 그를 바꿔놓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 놓여 있었다. 여신교의 로자리오가 피웅덩이 안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디체도 결국 그의 목숨을 구원해주지는 못했다.



옆에서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친구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설명해주었다.

"머리의 일곱 구멍에서 피가 쏟아져나와 있었어..."

"끔찍한 광경이야."

그 말을 듣자 내 목에서 짐승같은 소리가 터져나왔다.



"끔찍한? 방금 끔찍한이라고 했나? 그는 자유를 얻은거야! 우리를 옥죄어오는 진실 앞에서! 저 경계의 너머에서 웅크린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존재들에게서 도망친거라고! 저걸 부숴야 해! 저 저주받을 혜성의 눈동자를 부숴야한다고!"



나는 온 힘을 다해 외치며 손가락으로 혜성의 눈동자를 가리켰지만 수사원처럼 보이는 자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내게서 멀어졌다. 나는 허탈한 상태로 아직 경계 안에 있는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우리에게 어떤 재앙이 다가오고 있는지.

고통에 찬 나는 더이상 갈기갈기 찢겨버린 마음에 괴로움을 지우는 것을 더이상 견딜 없었다. 이제는 내 차례라는 것을 직감으로 알아챘다.

나는 끝을 마주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혜성의 그림자가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느껴지는 불길한 붉은 빛을 내뿜으며 서 있었다.



너 저주받을 불길한 구조물. 나는 너의 정체를 알고 있다. 너는 파스투스라는 이계의 신의 한 부분이다.

혜성의 눈동자를 노려보듯이 바라보고 있자 저 혜성의 눈동자 너머에 있는 무언가와 눈이 - 그 붉은 돌에는 눈이라 부를만한 것이 없었지만 - 마주친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나를 이성과 뒤틀림을 가르는 저 일렁임으로 이끌은 저 너머에 웅크리고 있는 존재는… 이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칠흑의 검사가 가지고있는 그 검...검에 박혀있는 눈동자 모양의 장식과 같았다!


정신차려보니 암흑 속에 있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길잃은 자들의 이정표처럼 반짝이는 별들 너머로 보이는 경계없는 어둠의 영역은 오히려 한낮 같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본능적으로 이곳이 별들의 공간임을 알 수 있었다.

이곳에는 별이 없었다. 아니, 하나 있었다. 사람들은 별이 밤하늘에서 찬란한 빛을 흩뿌리는 천상의 존재라 말한다.


그렇다면 과연 내 앞에 존재하는 빨아들이는 듯한 어둠이자 광기의 근원을 과연 뭐라고 불러야 할까? 어둠의 별, 강림을 준비하며 이 세계를 피로, 죽음으로 물들이는 이계의 신은 우리의 이성 그 너머의 범접할 수 없는 차원에 존재하고 있었다.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어둠이 경계선이 보이지 않는 거대함으로 내 앞에 있었다. 이곳에는 눈을 밝힐만한 빛이 없었지만 왠지 그보다 심한 어둠이 앞에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흥미로운 부름이 있어서 왔더니 감히 어리석은 인간이 나를 찾았던 것인가?」

감각으로, 본능적으로 나는 내 앞에 있는 별에게서 감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것이 똑바로 나를 보고 있었다. 우리가 감히 파스투스를 안다고 말할 수 있었나?

파스투스의 진언이 내 머릿속에 웅웅 울렸다.



「나를 찾았으니 그 상으로 앞으로 다가올 일을 보여주겠다. 한낱 필멸자에 불과한 그 지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리는 없지만.」

모든 것을 꿰뚫고 재창조하는 눈빛이 내 머리를 거칠게 헤집어다니는 것이 느껴졌다

'나'라는 존재가 그 눈빛 앞에서 세세하게 해체된 다음 다시 그자의 마음대로 창조되었다. 상상을 초월한 고통이 온몸에 내리달랐고 몸의 작은 조각 하나하나 비명을 질렀지만 목에서는 가는 목소리 한 올 나오지 않았다. 그 눈빛!



신이시여, 신이시여!



파스투스가 지나가고 남은 곳은 어긋난 흔적과 뒤틀림밖에 남지 않았다. 비틀린 이성은 그 무엇도 될 수 없다. 더 이상 내게는 이성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았다. 지금의 이 상태에서는 생각을 이어나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신이시여.  사도니아에 자비와 구원을! 오! 보인다! 광인이 절망 안에서 허우적대며 거부할 수 없이 눈앞에 보여지는 이 예견된 멸망 앞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워했을까.



그것은 우리를 노리고 있었다. 우리 조상의 때부터, 조상의 조상 때에,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부터! 광기 속에서 지나친 여섯 번의 죽음 그리고 최초의 탄생 그 이전부터!



어두운 별이 사도니아를, 오르비스 세계 전체를 저 가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한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심연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마지막 남은 이성의 파편에 최후의 경고가 떠올랐다.



사도니아에 멸망이 찾아왔다.




E.



퍼루티아력 Xx년 x월 Xx일.



내가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을 때 퍼랜드 고문서 관리관인 --는 광장 중앙에 설치되어 있는 혜성의 눈동자 앞에서 이상한 말을 지껄이며 짐승처럼 그것을 훼손하려 하고 있었다. 다른 시민들에게 피해가 될까 서둘러 그를 연행했다. 그는 이미 사람이라 부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를 정신병원에 수감할 수 밖에 없었다. --가 저렇게 변해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동료들은 가까운 며칠동안 그가 극도의 불안, 공황증세를 보였으며 이틀 전 친하게 지내던 그의 동료(나도 개인적으로 그를 알고 있었다. 명예로운 삶을 살았던 자다.) 가 정체불명의 기이한 방식으로 죽은 후로 그 증세가 더욱 심해졌다고 증언했다.

과연 그를 미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저주받은 운명에 깃든 광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최근에 시도니아 전역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모종의 사건들과 관계가 있는 것일까?

도대체 그 뒤에는 무슨 배경이 있는 것일까?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신께서 퍼랜드를 보호하시길 바랄 뿐이다.


정보대 소령 랜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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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러브크래프트를 흉내낸 파스투스 리뉴얼 편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중간에 나오는 갈색 피부의 남자는 현자 바알입니다. 이유는 월광 극장편을 보신 사람이라면 제가 어느 부분을 따왔는지 아실 겁니다.


다음에 올릴 팬픽은 퀸&잭2화나 제가 예전에 적었던 만우절용 스토리입니다. 표지는 게임 내 니르갈 일러스트를 좀 빌리겠습니다. 이 정도는 용납해 줄거라 생각합니다.

아니 해주실 수 있나요?


디리벳&스트라제스는 그림이 와야 올릴 것 같습니다.

슬프네요.



#파스투스 #팬픽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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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10 06:12 (UTC+0)

    아 어쩐지 중간부터 크툴루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랬군요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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