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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7팬픽 : 파스투스

※ 에피소드 2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교수가 분필을 들더니 칠판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학생들은 무표정하게 쳐다본다. 평소에도 난해한 문구가 자주 등장하는 탓에 학생들은 이번에도 또 무슨 괴이한 것을 가져오나 생각했다.

탁. 분필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교수는 적는 것을 마쳤다.


‘감히 우리는 세상을 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앎은 인간의 무지함을 최악의 형태로 비틀어 놓은 것이 아닐까.’

문구를 다 적은 교수는 분필을 내려놓고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이 문구는 학자 카론의 수기에 등장하는 겁니다. 의문형으로 쓰인 것은 당시의 위치헤이븐의 시조를 따랐기 때문이지요. 금서학의 시작이라 말할 수 있는 이 문구를 통해 우리는 저자가 회의에 빠졌다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번만 더 생각해 보세요. 전후 맥락을 보면 전혀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바로 전 단락까지만 해도 저자는 자신이 찾아낸 것에 대한 극상의 희열에 빠져 있었습니다. 저자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뭘까? 많은 학자들이 사색 속에서 카론이 찾아낸 것이 새로운 앎이 아니라 인간의 무지함 그 자체라는 것에 많은 힘을 싣고 있습니다. 인간의 학문이 ‘명백한 앎’ 위에 서 있다는 것이 아니라 ‘명백한 무지’ 위에 근거한다는 것이지요”


교수는 학생들이 앉아 있는 방향을 쭉 둘러보았다.

“이제 시간을 줄 테니 이 문구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생각해 내서 발표해 보도록 합시다. 대략…반 시 정도 드리겠습니다.”

학생들의 얼굴 위로 경악한 표정이 서서히 드러나는 가운데 교수는 무슨 일 있냐는 표정으로 학생들을 바라보면서 시계를 꺼내 들었다.

“그럼 시작.”

그러자 학생들은 교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방에서 황급히 펜과 종이를 꺼내들었다.

 

- 퍼랜드 국립대학의 금서학 수업 중에서



1



당신은 스트라제스를 아는가?

침울한 표정을 지은 채 뜻 모를 생각을 마음 깊숙한 곳에 품고 다니는 듯한, 가늠할 수 없는 무용을 가진 자.

나는 그를 직접 본 적이 있었다.

스트라제스가 퍼랜드와 협상을 맺기 위해 자신의 수많은 군세를 뒤에 남겨두고 적진인 퍼랜드 시내에 단신으로 들어왔던 날. 그를 구경하려고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당연히 나도 그들 중에 있었다.



시티로드인 릴리아스와의 협상은 잘 끝났던 모양이다. 퍼랜드는 혜성의 눈동자라는 구조물을 도시 내에 두는 조건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방울까지는 아니었다. 만용으로 그의 함부로 뒤를 쫓았다가 흔적없이 사라진 자들이 땅에 흘린 피를 생각한다면 말이다.

스트라제스를 본 적이 있는 자는 그가 항상 곁에 두고 다니는 검도 보았을 것이다.

붉은 눈처럼 생긴 보석이 박혀 있는 기이함마저 느껴지는 마검.

검을 처음 보았을 때 그 검도 똑같이 나를 쳐다본다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깜짝 놀란 나는 그 검을 다시 자세히 보았다. 섬뜩한 느낌은 곧바로 사라졌지만, 한눈에 나는 그 검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물질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다른 세계에서 넘어왔다고 알려진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주인처럼 말이다.



실제로 그가 하는 행동은 사람들에게 의문으로 남아있었다.

아킨 평원을 전부 뒤덮을 만큼 강대한 군세를 데리고 다니면서 하는 일이라고는 사도니아 곳곳에 혜성의 눈동자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건축물을 세우는 것 뿐이다.

게다가 스트라제스는 군세를 이끌고 산드라 유적지를 향해 가면서 오로지 자기 앞길을 막는 자들만 상대했다.

물론 저항하는 자들에게는 형상도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결말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트라제스를 엄청난 무력을 가진 기이한 기사로만 알았다.

그 사건을 겪기 이전의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하지만 모종의 사건을 통해서 나는 그 의미가 없어 보이는 일들이 모두 멸망을 향한 일련의 준비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신의 의도대로 시도니아에 멸망이 내려오기까지는 몇 걸음 남지 않았다.

그 신의 이름은 파스투스... 어두운 별.

이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는 너무 늦고 말았다. 나는 돌아오지 못할 경계를 넘어 그 너머를 엿보고 말았다.

죽음이 건네준 음식을 먹은 여인이 밝은 빛과 따뜻한 햇볕이 존재하는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자신은 이미 어둠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그림자로 변해버렸다는 비극적인 이야기처럼 말이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인간에게, 무지 안에서 한껏 누리던 편안한 삶으로 되돌아올 길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나도, 그리고 감히 금지된 지식의 영역에 발을 내디뎠다가 기괴한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한 내 친구에게도.



계속해서 정신을 침범해 이성을 갉아먹는 환상에 시달린 끝에 나는 결국 살아가는 것에도 지쳐 버렸다. 매순간마다 죽음을 바랬고 생명을 버려서 얻을 수 있는 영원한 안식을 바라고 칼을 집어 든 적도 수도없이 많았다.

하지만 파스투스는 내 친구에게는 허락한 그 자비를 내게는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내 영혼을 비틀어 놓았다. 자연이 빚은 정교하고 아름다운 생명을 메스꺼움마저 느껴질 뒤틀린 괴이한 것으로 바꾸어 버리는 저주를 내 정신에 새겨 놓았다.


그러자 광인의 예언서에 적힌 것처럼 내 눈에도 이상한 것들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알지 못하는 곳에서 온 존재들이 그림자 속에 숨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어디에나 있다. 작은 그림자 속에, 틈 사이에, 내 시야가 닿지 않는 모든 곳에. 벽 너머에서 수많은 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소리가 가득하다. 공포가 내지르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제 내 정신은 침략자가 약탈하고 남은 폐허처럼 황폐하고 공허했다. 이성이 떠나버린 남은 빈자리를 차지한 광기가 이제는 내 영혼마저 삼키려 불꽃처럼 욕심 많은 그 혀를 넘실거렸다.

가까스로 남은 이성을 끌어모아 이렇게 펜을 든다.

혹시라도 재앙이 사도니아 전역을 뒤덮어 버리기 전에 운 좋게도 나의 이 기록을 본 자가 있기를. 그리고 진실을 깨달은 그가가 이땅에 내려올 재앙을 막아주기를.



이야! 파스투스, 네뷸라!

그 이름의 뜻을 알고 부르며 따르는 자들에게 끝없는 저주 있으라!

(이 뒤로는 글씨가 뭉개진 탓에 더이상 읽을 수 없었다.)



2



나는 퍼랜드의 고문서 기록관이다.

낡은 기록의 집이 우리의 일터고 옛사람들이 후대에게 떠맡긴 기록들을 보존한다는 명목으로 매일을 가치란 하등 없어 보이는 지난 과거에 낭비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일은 삶과 같으니, 우리의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그러므로 우리의 삶도 결국에는 쓸모가 없어지는 게 아닐까? 이렇게 먼지냄새가 나는 곳에서 일하다 보면 이상한 생각이 가끔 떠오른다.


비록 나는 무신론자이지만 여신쟁이들이 말하는 대로 죽어서 신을 만난다면 '도대체 왜 이렇게 먼지나는 곳을 만드셨나요?’라고 물어보고 싶다.

신조차도 필요로 하지 않아 가져가지 않고 이 땅에 남겨진 것이 과거인 마당에 도대체 무슨 미련이 있어 정부가 이런 기관을 만든 것인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일이 편하고 보수도 넉넉해서 일부러 직장을 옮기지 않고 계속 퍼랜드 기록 보관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서문이 길었다.

파스투스. 내가 그 이름을 알게 된 것은 꽤 이름있는 유적 탐험가로 활동하고 있던 친구를 통해서였다. 본명은 말할 수 없다. 비록 지금은 그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남은 자들을 위해서라도 친구의 본명은 끝까지 비밀로 남기고 싶다.



친구는 겉으로는 유적 탐험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사실 퍼랜드 정보국 소속이었다. 비록 그가 위장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본래의 직업이 정보원이라는 사실을 아는 나도 가끔 착각할 만큼 그는 탐험을 좋아했고 또 그 안에서 완벽하게 적응해 나갔다.

그는 항상 탐사에서 돌아오고 나면 나를 불러 탐사 도중에 보았던 것을 이야기해주곤 했다. 친구가 꽤 이야기를 잘 풀어나가기도 했고 내심 나 자신도 그런 신비한 것들에 흥미가 동했기 때문에 그가 나를 부르면 흔쾌히 가서 즐겁게 이야기를 듣고 그랬다.



이번에도 탐사에 돌아온 그가 풀어놓을 이야기 보따리가 한 꾸러미 있는 모양이었다.

산드라 유적 쪽으로 간다던 친구는 탐사에서 돌아오자마자 자주 만나던 술집에서 저녁도 먹을 겸 일이 마칠 시간에 만나자고 했다. 최근에 나는 특별한 일 없이 반복되는 일상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참에 친구가 부르자 퇴근하자마자 약속 장소로 냉큼 달려갔다.



널빤지로 이어진 천장 밑에 등불이 흔들리고 불빛에 선술집의 모든 것들이 홍조를 띤다. 조금 어두운 조명 아래 술집의 분위기는 왁자지껄했다.

주변에 있는 테이블에는 곧 다가오는 주말을 맞아 흥겹게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한가득 차지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주변의 분위기에 물들었지만 평소에도 주위에 어울리지 않고 혼자만의 분위기를 가지던 친구는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은 채 진지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이번 이야기는 꽤 심오한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친구는 항상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는 분위기를 무겁게 하는 습관이 있었다.

나는 별말없이 술을 홀짝였다.



기억을 정리하는 친구의 머리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마침내 정리가 다 끝났는지 친구가 그동안 어두웠던 표정을 한껏 풀어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혹시 이계의 신에 관심 있나?"

"이계의 신?"

"그래. 리타니아의 일리오스교나 모피드 분파, 아킨 유배지의 고룡 신앙처럼 이단이나 사이비가 아닌 정말로 금지된 신을 말하는 것이네. 혹시 파스투스란 이름, 들어본 적 있는가?"

특이하고 쓸모없는 것들을 유독 잘 기억한다고 내심 자부하는 편이지만 심지어 일하면서 지나친 기억 속 고문서 문구들에도 그런 이름은 있지 않았다.

"파스투스."

속으로 되뇌어보니 이름의 끝마디가 거친 숨결이 되어 잇사이를 빠져 나갔다. 숨결은 입술을 통과해서 거룩함과 가증스러움을 동시에 지닌 이름이 되었다.

"들어본 적 없네."

"그래. 나도 이번 원정 이전에는 들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이번에는 신드라 유적쪽으로 갔는데 말이야…"

그의 뛰어난 실력만큼이나 추임새가 가득한 그의 이야기를 읽는 사람이 지루해서 나가 떨어지지 않도록 정리해 보자면 이랬다.



고대 산드라 유적을 탐사하던 도중에, 하루 정도 친구는 탐사대와 떨어져서 혼자서 고대 산드라 도시의 한구석에 세워진 한 낡은 신전에 들어갔던 날이 있었다고 한다.

주변이 우거진 수풀로 가득했기 때문에 친구는 신전의 입구를 찾느라 꽤 고생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지.” 친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에는 아마 탐사대 본대와 탐사 방향에 대해 약간의 의견 마찰이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안에 들어간 친구는 깜짝 놀랐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신전 내부는 경탄이 나올 정도로 그 본모습을 완벽에 가까운 상태로 유지하고 있었다.

돌을 깎아 만든 석벽은 훼손된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벽에 그려진 그들의 신화를 묘사한 문양이나 그림들은 고대 산드라인이 사랑하던 원시적이지만, 그 덕에 자연의 조화로움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별을 신성시해서 표현한 여러 작품들과 이곳저곳에서 보이는 빼어난 천문학 지식은 현재의 콘스텔라의 별 숭배가 이곳에서 시작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었다.



여기까지 말한 친구는 아직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지 않았다고 하면서 공책을 꺼내 그림 몇 장을 내게 보여 주었다. 그곳에는 특이한 매력을 가진 스케치가 몇 장 그려져 있었다. 친구는 내게 직접 이 그림의 의미를 설명해 주었다. 이것은 별, 이것은 태양. 그리고 동물과 자신들의 건물로 보이는 의미의 그림이 몇 장 더 있었다.



친구는 유적이 자신에게 보여주는 보물과도 같은 광경에 기뻐하며 바깥에서 새어 들어오는 햇빛에 의지해 신전을 계속 조사해나갔다. 친구는 기대했다. 분명히 이번 발견이 발표된다면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었다.

(친구가 중간에 덧붙였다.이번 발견을 정리해서 논문으로 구상 중인데, 이것만 잘 된다면 앞으로 사는 건 하나도 걱정이 없을 거야!)



어느새 날이 어두워지고 유적에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했다. 돌벽을 붉게 물들이는 태양빛도 곧 꺼지려는 촛불처럼 불안하게 그 밝음을 다해갔다. 친구는 신전 내부로 향하는 복도를 바라보았다. 아직 신전의 겉면밖에 조사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탐험가의 감이 안쪽에는 분명 더 대단한 것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글의 밤은 위험했다. 잘못해서 길을 잃는다면 제때 본대에 도착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목숨까지 위험할 수 있었다.

그대로 본대로 돌아간 다음 나중을 노리는 거야. 하지만 이 생각은 곧 강력한 반론에 부딪혔다. 나중이란 게 있을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예욕으로 가득한 자들이 과연 내 발견을 인정해줄까?

끈적이듯이 복도에 가득 찬 어둠이 친구의 결정을 기다리며 조금씩 꿈틀거렸다.

친구는 마법등을 켜고 밝기를 세게 했다. 인공적인 푸른 불빛이 유적의 복도를 밝혔다. 방금까지 붉은 석양에 생명을 얻었던 복도가 마법등에 창백함을 얻어 되살아난 모습은 산드라 신화에서 말하는 죽은 자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친구는 혹시나 곳곳에 있을 함정과 갑자기 나타날수도 있는 몬스터를 경계하면서 유적 내부를 탐사해 나갔다. 어디선가 얼굴에 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피부에 닿자 풀 내음이 났다. 코끝에 한밤의 싸늘함이 느껴지는 바깥의 공기였다.

그때 갑자기 어딘가에 숨겨진 통로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반짝 떠올랐다. 산드라 유적의 신전은 대부분 중요한 물품들을 숨겨진 방 안에 보관했다. 주변을 꼼꼼히 조사한 결과 친구는 벽 사이에 나 있는 구멍에서 바람이 새어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호기심이 동한 친구는 곧바로 구멍을 넓힌 다음 미지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음침함이 감돌고 있었다. 형언 못할 고약한 냄새를 내는 공기가 안에 가득했다. 그동안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독하고 역겨운 냄새에 들어가자마자 코가 찡그려졌다.



마법등을 높이 들어 올리자 천 년이 넘는 세월동안 길고 긴 잠에 빠져 있었던 공간의 신비가 푸른빛을 받고 되살아났다. 정방형 모양으로 사면이 모두 석조벽으로 이루어진 이 공간은 제의용 방이었다. 열 사람 정도가 방 안에서 의식을 치르기에 충분한 크기였고 한가운데 있는 소형 제단에는 분명 불을 피운 것이 분명한 그을린 흔적이 미세하게 남아 있었다. 한구석에는 제물로 바친 것들의 잔해인지 상당한 크기의 뼈무덤이 있었다.  뼈들의 형태가 익숙하고 또 흘깃 쳐다보자 눈에 방금 보았던 것들의 잔상이 남을 정도로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형태의 뼈들도 중간에 섞여 있었다. 친구는 뼈무덤에서 애써 시선을 떼었다. 



그때, 한쪽 벽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중앙에 있는 제단보다 훨씬 화려하고 커다란 제단이었다. 유적지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특이한 형식으로 지어진 제단은 이끼에 뒤덮여 있었다. 빛을 받자 불길할만큼 창백한 제단 위에 끈적거리는 녹색이 기어다녔다.



친구는 이유 모를 두려움과 수천년을 내려온 본능이 가져다주는 강한 경계심에 사로잡혔지만 호기심이 모든 부정적인 생각들을 밀쳐냈다.

느린 발걸음으로 제단에 가까이 다가간 친구는 여러가지를 발견했다.

제단 한구석에는 피가 엉겨 붙어 있는 흑요석 단검이 놓여져 있었고…

(분명히 이걸로 제물의 숨을 끊었을 거야. 친구는 내 앞에 흑요석 단검을 내려놓았다. 거칠게 깎인 그 무수한 단면들이 제물의 살을 무자비하게 파고드는 생생한 장면이 떠올라 순간 소름이 돋았다.)

어두운 광물로 만든 원판이 한가운데 놓여져 있었다. 마법등으로 원판을 비추자 금속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원판은 차갑게 빛났다.

원판을 만져보니 투박한 감촉이 전해져왔다. 분명 금속이 아닌 미지의 돌로 만든 것이었다. 원판의 한쪽 방향에는 눈 모양이 새겨져 있었고 그 위에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반대로 돌려보니 문구가 테두리를 따라 둥글게 새겨져 있었다.

드디어 해석할 수 있을 만한 증거를 발견한 친구는 휘파람을 불며 기뻐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친구는 콘스텔라에서 수학하는 도중에 고대 산드라어를 배웠었다.



탐사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온 친구는 하루동안 어디 있었냐는 가벼운 말을 건네는 사람들을 전부 물리치고 방에 틀어박혔다.

원판에 금이 가있고 상당히 많은 피가 눌러붙어 있어서 읽는데 힘들었지만 끝끝내 원판에 새겨진 글귀를 해석해낼 수 있었다.

'약속된 때가 다가오면 어두운 별 파스투스가 하늘의 별들을 전부 삼킬 것이다.'



"어두운 별 '파스투스'. 그게 그들이 섬기던 신의 이름이었어."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나자 신기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극소수의 고대인들이 비밀스레 섬기던 신의 이름. 어두운 별 '파스투스'.

고대 신드라인들은 지금의 콘스텔라처럼 별을 섬겼다고 한다. 그런 그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밝은 별들과 적대하는 어두운 별을 섬기는 자들의 끔찍하고 잔혹한 의식은 내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상상력이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금기된 의식을 조각을 짜맞추듯이 완성해 나갔다.

어둠이 내려앉은 신전, 감추어진 방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인다.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질문의 답은 질문. 비밀에는 비밀로 답할지니 그들이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드디어 희생제물이 이끌려나온다. 사람, 그것도 기절한 성인.

오늘의 의식을 거행할 자가 흑요석 단검을 두 손으로 받치고 들어올렸다.

다음으로 제단에 불을 피운다. 생명이 빠져나간 흔적마저 불살라 신께 바칠 모양이다.



깎아서 만든 투박한 흑요석 단검에 빛이 무수한 방향으로 반사되어 반짝였다. 수많은 단면으로 뒤덮인 단검은 그 생명을 취할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무고한 희생자를 향해 끝없는 악의의 시선을 던졌다.


집행을 맡은 인원이 단검을 높게 들어올린 다음 내려찍었다. 투박한 흑요석 칼날이 살점을 파고들었다. 찌른 곳은 아슬아슬하게 급소를 빗나갔다.

엄청난 비명이 방을 뒤흔들었다. 숨을 끊기에는 모자랐다. 피만 흘러나오고 희생자가 다시 의식을 되찾아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것도 또한 그들이 의도한 것이었다.

제물의 고통은 그의 신을 한층 더 기쁘게 해줄 것이었다.

타오르는 불길 속 타락한 사제들은 광기의 찬가를 부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노랫가락 사이로 감출 수 없는 비명이 찢어지듯 울려퍼지는 동안에도 찬가는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찌른다. 피가 뿜어져 나와 온몸을 적신다.

음이 빨라진다. 그들의 춤도 점점 광기에 잠식되기 시작한다.

찌른다. 울려 퍼지던 비명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부 외쳤다.

우리의 신은 피를 원하신다.

찌른다. 노래가 멈출 수 없을 만큼 빨라진다. 그들이 섬기는 신은 추종자들이 올리는 제물을 흡수해 더욱 음산하게 빛날 것이다.

찌른다. 높아진다. 찌른다. 

이제 그들의 찬가는 노래보다는 짐승들의 새된 울음소리에 보다 가까웠다.

사제가 흑요석 칼을 높이 들었다. 벽에 비친 일렁이는 그림자는 그것이 제물 한가운데로 꽂히는 것을 보여 주었다.

검이 희생자의 심장에 꽂히면서 전과 비교할 수 없는 양의 피가 튀어 오르고 그들의 의식은 그렇게 마쳤다.



3.


친구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뒤로 며칠이 더 지난 어느 날. 친구가 갑작스레 나를 그의 집으로 불렀다. 그러자 나는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빠르게 달려갔다.

문을 열어준 친구는 꽤나 꼴불견 이었다. 며칠간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했는지 얼굴은 그동안 쌓인 피곤으로 어두컴컴했고 눈두덩은 움푹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은 유독 빛나고 있었는데, 저번 만남과는 달리 그의 검은 눈동자 안에서 붉은 광기가 언듯 모습을 내비치다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어서 와! 내 절친한 친구!"

"왜 이렇게 반갑게 맞이하고 그래? 설마 나를 제물로 그 신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하는 건 아닌가?"



나는 그 말을 하고 곧바로 후회했다. 내 눈에 비친 그의 눈이 미지에 대한 열망으로 타오르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었다. 방금 본 친구의 눈빛은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도 만약 내게 칼이나 총이 있었다면 당장에라도 뽑아 들었을 정도였다.

다행히도 친구는 칼을 치켜드는 대신에 고개를 저었다.



"하하. 아니야. 방금 그 추측은 재미있었어. 하지만 잊었나? 내가 무신론자라는 사실을? 가장 친한 친구를 정체도 모르는 신에게 바칠만큼 어리석지는 않아. 내가 부른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야. 일단 들어오게. 보여줄 것이 있으니."



서재로 이동하자 그는 앞서 말해주었던 원반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실제로 보는 원반의 첫인상은 투박했다. 검다기보다는 붉은색이 돌았고, 엉겨 붙은 피 때문에 아니면 그곳의 어두운 환경 때문에 잘못 보았나 생각했다.

메달 그 자체는 붉게 빛나는 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것을 보면서 떠오르는 게 없나?"

"떠오르는 것이라? 어떤 것?"

"단서를 주자면, 주변에 있다네. 그리고 아마 오면서도 봤을 것일세."



주변에 있는 것이라? 나는 기억을 되감아보았다. 오는 길은 유난히 맑았고 길에서 보이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광장 중앙에 새로 생긴...새로 생긴?

나는 친구의 질문 안에 내포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친구도 내가 깨달았다는 것을 보고 알아챈 모양인지 기괴함이 드러난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그래. 혜성의 눈동자야. 릴리아스님이 얼마 전에 퍼랜드 전역에 만들라고 말했던 그것. 스트라제스가 지나간 직후에 만들어진 그것 말이야."



혜성의 눈동자.

이계의 기사 스트라제스가 지나가는 곳마다 세워진다는 이상한 구조물은 불길하게 빛나는 붉은 돌을 기둥 위에 얹은 형태였다. 생긴 것은 시시한 예술가의 보잘것없는 상상력의 산물이었지만 쳐다보면 기분 나쁜 느낌을 주기 때문에 퍼랜드의 모두가 그것을 꺼렸다.

어쩌면 그것을 설치한 릴리아스를 빼고는 다들 그것을 미워할 것이다.

어쩌면 릴리아스까지?


생각해보니 친구의 집에 오면서 혜성의 눈동자의 옆을 지나칠 때에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위화감이 들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본 그곳에는 생명이 없는 붉은 눈동자만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어지는 친구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내가 더 찾아본 것이 있지. 문서 보관소에 금서 보관 구역이란 게 있더라고?"

"그렇지."

나는 대답했다. 당연히 문서 보관소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통칭 금지구역이라고 부르는 그곳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알지만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금서와 관련된 모든 것이 비밀에 부쳐져 있었을 뿐 더러 퍼랜드 의회의 허가증이 없으면 접근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이곳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모두 다 그곳을 없는 부서 취급했다.

오직 그것을 듣고 신기해하는 것은 새파란 신입 뿐이라 우리는 그것을 '신입선별구역'이라고 농담조로 부르고는 했다.



"알려줄 수 없는 경로를 통해… 그곳에 파스투스에 대한 환상을 본 사람이 쓴 예언서가 있다고 하더군. 그래서 오늘 밤에 몰래 들어가려고 하는데, 같이 가지 않겠나?"

"오늘 밤? 그래. 그거야….뭐?"


내가 경악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자 내 반응을 지켜보던 그는 장난스레 씩 웃었다.

“잘 들은 것 맞네. 오늘 밤. 금지된 신을 찾아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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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8 수정.)

예전에 쓴 파스투스 팬픽을 고쳐 다시 적어봤습니다.

절대로 공식 작가님이 건들지 않을만한 소재들만 적으니 겹칠 걱정은 없겠네요.


고민입니다. 지금까지는 팬아트를 어떻게든 구해서 팬아트 게시판에 올렸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팬아트가 없는 팬픽은 어디에 올려야 할까요.

일단 하던 대로 팬아트 게시판에 올려봅니다.

파스투스는 2편 완결이고 이후 파라디아 탈출로 한편 적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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