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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7팬픽 - 빛의 천사 안젤리카

※ 여름 서브스토리 : '성검기사단과 여름의 군주' 에서 에필로그격으로 나온 '미니 월광 극장 : 열쇠' 를 각색했습니다. 그럼 즐감해주세요!


※ 잔인한 묘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연구소 한가운데 거대한 기둥처럼 생긴 장치가 서 있었다.


장치 주위로 기계들이 복잡하게 늘어서 있다. 그 사이를 연구원들이 개미처럼 돌아다닌다.


기계에서 나오는 시끄러운 소음. 번쩍이는 불빛들.


연구원의 시선은 화면 위에 머물러 있고 손은 의미 모를 수치를 기록하기 바쁘다.


희끄무레한 빛이 장치 바깥으로 새어 나온다.


빛이 어디서 새어 나오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근원이 누구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장치 안에서 누군가 고른 숨을 내뱉고 있다.


작고 여린 소녀였다. 순백색 천으로 몸을 가린. 그리고 백금색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의 주위를 두꺼운 유리가 감싸고 있다.



잠들어 있는 소녀의 표정은 더없이 평화로웠다.



반대로 소녀의 팔과 다리는 구속장치로 묶여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연구원들이 소녀가 깨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 같았다.


게다가 전투용 안드로이드들이 빈틈없이 경계하는 모습은 분위기에 긴장감을 더했다.


소녀가 눈을 뜨고, 멸망을 향해 달려가던 지구에 마침내 약속된 대참사가 일어난다면 소녀는 살아남은 생존자들 사이에서 ‘천사’ 라고 불릴 것이었다. 


 


지구의 인간이 소녀에 대해 아는 사실은 얼마 없었다. 아니, 근본적인 관점에서는 아예 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릇’ 그리고 ‘천사’


노아드 박사를 필두로 연구소의 전 인원은 동토에서 발견된 이것의 정체를 알아내려 연구를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연구는 미궁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입구로 돌아갈 수 없었다. 출구도 찾을 수 없었다. 단 하나의 실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옛 전설에 등장하는, 영웅이 미궁을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왔다는 실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 연구원이 한 손으로는 머리를 짚은 채 책상에 앉아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연구원은 꽤 높은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바쁘게 돌아다니는 다른 연구원들과 달리 한 자리에 앉아 고민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으니까.


연구원의 시선은 자료 위에 가 있지만 내용은 머릿속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손으로 자꾸 머리를 뒤집은 탓에 머리 모양은 엉망이 된지 오래였다.


책상의 상태도 주인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평소에는 강박적일 정도로 청결을 중시하던 책상은 지금 보통 사람이 보기에도 정신이 사나울 정도로 어지러웠다.


연구원은 최근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며칠 전에 노아드 박사와 선임 연구원들과 함께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화면 너머의 남자는 얼굴에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에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도 그의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를 숨기지 못했다. 남자는 말을 시작했다.


마지막 성검의 수뇌부는 '천사'와 '그릇'에 대한 연구에 대해 큰 기대를 하고 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기대한 만큼의 성과가 나오지 않고 있다. 만약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남자의 말은 여기서 멈추었다.


말로 어떠한 반응을 유도할 의도였다면 이미 충분히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노아드 박사의 표정은 굳어진 지 오래였고 연구원들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는 얼어붙은 것처럼 싸늘했다.


수뇌부와 연구소는 입장 차이로 자주 부딪혀 왔다.


그들은 근본적인 해결보다는 지금 당장에 닥친 문제에 대한 해결을 요구했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들은 진리를 손으로 잡을 수 있고 또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문득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표현이 떠올랐다. 돈처럼.


연구원은 속으로 쿡쿡대며 웃었다.


‘그래. 돈처럼 말야.’


그때 옆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자료를 보고 계신 건가요? 그러다 눈이 나빠지겠어요.”


연구원은 몸을 움직이지 않고 시선만 힐끗 옮겼다.


갈색 머리를 길게 내려뜨린 후배의 얼굴과 눈앞에 내밀어진 커피 잔이 눈에 들어왔다.


후배는 이곳으로 온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연구에 참여하는 대신 자료를 정리하거나 잡일을 도맡아 했다.


평소에는 쉴틈없이 바쁠 후배가 이렇게 커피까지 마련해 올 정도면 아마 점심시간일 것이다. 아니면 저녁이거나.


잘 모르겠다. 지하에 있으면 시간 개념이 이상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후배는 자신의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고 생각했는지 뒤에 몇 마디를 덧붙였다.


"심각한 표정으로 자료를 뚫어져라 보는 것 같아서요. 별다른 뜻은 없었어요."


"아니야. 커피는 잘 마실게."


연구원은 방금까지 뚫어져라 보던 자료를 책상에 내팽개친 다음 커피를 받아 들었다.


마침 카페인이 필요했던 참에 몸 속에 카페인이 돌기 시작하자 가시가 돋친 것처럼 예민해 있던 생각이 점차 가라앉는다.


책상처럼 어질러져 있던 생각이 말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정리가 될 즈음 연구원은 입을 열었다.


“저것이 발견된 지 반 년 정도 지났을 거야."


"그런가요?"


연구원은 손가락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후배가 의자를 끌어서 옆에 앉자 연구원은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그 날과 비교해도 연구는 하나도 진척이 되지 않았어. 우리가 아는 사실은 신호를 분석해서 알아낸 극히 일부의 사실 뿐이야. 저것을 보낸 문명, 저것의 정체, 그리고 신호의 뜻. 우리는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어. 지금 노아드 박사님이 연구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수뇌부를 상대로 담판을 지으러 간 사이 우리는 이렇게 앉아 소녀의 상태나 체크하고 있지. 이제는 우리가 연구원인지 보모인지 모를 지경이야. 혹시 시각을 잃어본 적 있어?”


“시각이요? 아니요.”


이제 후배는 의식의 흐름대로 전개되는 연구원과의 대화에는 익숙해졌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바람과 같은 대화였다.


“난 있어. 어릴 때 사고로 눈이 다친 것 때문에 수술을 받아야 했었지. 며칠 동안은 눈에 붕대를 감고 살아야 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심연을 더듬어 가야 하는 그 기분은 정말로 끔찍했지. 지금처럼 말이야. 하지만 이번에는 시각 말고도 몸의 오감을 못쓰게 된 것 같아.”


연구원은 잔에 남아있는 커피를 한번에 몸 속으로 때려 넣었다. 그러자 정신이 확 깨어났다.


연구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구속장치 앞으로 걸어갔다.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려온다.


눈앞에 거대한 유리관이 보였다. 그 안에는 '천사'가 구속장치에 묶인 채 잠들어 있었다.


더없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천사에게는 인간의 더러움과는 다른,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다가오던 발소리가 옆에서 멈추었다.


“그런데, 정말로 이유가 있었을까?”


"네?"


갑작스럽게 던진 질문은 다시 질문자에게 되돌아왔다.


"수뇌부가 요구하는 대로, 정말로 천사가 지구로 오게 된 이유가 있을까? 우리는 기가 막힐 정도로 우연 속에서 일어난 일에 이유를 붙이는. 그런 쓸모없는 일을 하는 게 아닐까?"


따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구속장치 안에 잠들어 있는 소녀가 희미한 빛을 뿜어 대는 가운데 장치 앞에 선 두 사람은 한동안 침묵에 기댄 채 천사를 바라보았다.


천사의 등에 달린 날개가 유난히 돋보였다.


‘언젠가 인류도 이런 날개를 가지게 될 날이 올까?’


누군가 노아드 박사를 향해 이런 질문을 던졌다면 박사는 ‘그렇다’라고 자신 있게 답했을 것이다.


“노아드 박사님은 나와 다르게 생각하셨어. 내 말을 전부 들으신 다음 천사가 이곳에 온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씀하셨지. 그분은 천사를 ‘열쇠’라고 하셨어.”


“열쇠라니요?”


연구원의 머릿속에 옛 기억이 떠올랐다. 반 년 전에 노아드 박사는 자신이 서있는 이 자리에서 모든 연구원들을 모아 놓고 자신 있게 말했다.


“열쇠. 인류의 앞에 있는 ‘문’을 열고 인류를 그 너머에 있는 수많은 가능성으로 인도해줄 존재. 열쇠가 인류를 멸망의 순리에서 구원해줄 거야.”


과거의 산들바람이 태풍이 되어 돌아온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과거의 낙관론이 몰고 온 책임을 전부 떠맡고 있었다.


지구에 멸망이 도래했다고 말하기에 지금만큼 어울리는 때는 없었다.


인생에 하등 쓸모가 없는 싸구려 비관론이 판치고 허무주의가 세상을 흔하게 돌아다니는 지금, 노아드의 말은 실제로 놀라웠다.


그래, 꿈과 같았다.


연구원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천사를 향해 팔을 뻗었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거리에 노력하면 언젠간 천사에게 까지 닿을 것 같다는 감상이 들 때 쯤, 손가락 끝이 유리에 닿았다. 손끝에 유리의 차가운 감촉이 느껴진다.


“이게 우리가 연구하는 거야.”


“대단해요.”


후배의 말에 연구원은 머리를 긁었다.


“고작 하나의 이론일 뿐이야. 이론을 뒷받침해 줄 만한 증거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어. 보다시피 연구가 이 꼴이라 말이야.”


“그래도, 이 연구가 성공한다면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말이잖아요?”


“그렇지.”


“잘 됐네요. 이런 삶은 이제 지긋지긋했거든요.”


후배는 미소를 지었다. 어색한 미소였다. 자신의 말이 이상하게 들릴까 봐 일부러 짓는 미소.


하지만 연구원의 눈에는 이 인위적인 미소가 그렇게 의미가 있어 보였다.


왠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갈 곳 없는 생각과 둘 데가 없는 시선.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점에서 똑같다. 연구원은 일부러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말을 끝으로 다시 침묵이 흐른다.


연구원은 신경을 끌 만한 것을 찾기 시작했고. 그때, 연구원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뭘 그렇게 생각해?”


“네?”


연구원이 툭 던진 말에 후배는 눈에 띄게 당황한 티를 냈다.


“천사를 보면서 뭔가 자꾸 생각하는 것 같아서.”


“아. 그게... 천사가 깨어나면 어땠을까 상상하고 있었어요. 이곳에 온 뒤로 잠든 모습밖에 못 봐서요.”


“나도 깨어난 모습을 본 적은 없어.”


“정말인가요?”


“정말이야. 발견되었을 때부터 계속 잠든 채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천사가 깨어난 모습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네.”


“선배님은 어떨 것 같으세요?”


“일단 눈은 하늘색이지 않을까?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리고 목소리는 아름다울 것 같아요.”


“정말로 완벽한 천사 그 자체네.”


“그리고 깨어나서 저희들에게 말하는 거에요. 무슨 말이 좋을까요?”


어른과 어울리지 않는 천진난만한 말에 연구원은 한 소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만두었다. 평소와 같은 변덕이었다. 연구원은 잠깐 후배와 어울려 주기로 했다.


방금의 대화를 토대로 연구원은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다.


천사의 눈은 하늘처럼 맑은 파란색이다. 그리고 목소리는 아름다운 화음과 같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고통을 겪으며 한번이라도 묘사하려 노력한 천상의 화음이다.


잠에서 깨어난 소녀가 순수함에 알맞게 부끄러움을 참는 얼굴로 처음 보는 내게 말을 건넨다.


첫 마디는 무엇이 어울릴까.


평범하게, '안녕하세요.'는 어떨까?


연구원은 망상에 가까운 상상을 털어냈다.


후배의 상상은 재미있었지만 노아드 박사의 가설에 의하면 천사가 인간에게 친화적으로 행동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특히 탐사대가 천사를 발견한 곳에서 관측했던 신호에 의하면 오히려...


“선배님. 저거 보이세요?”


연구원은 후배의 말에 생각 속에서 깨어났다.


옆을 돌아보니 후배가 놀란 표정으로 구속장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천사가 움직인 것 같아요.”


“그게 도대체 무슨…”


연구원은 위화감에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확실히 방금과 비교해서 소녀의 자세가 조금이지만 달라져 있었다.


연구원은 유리관 앞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 소녀가 눈을 떴다.


방금까지 장난처럼 나누었던 대화가 눈앞에서 현실로 이루어졌다.


하늘을 담은 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슬프게도. 항상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는 진리가 하나 있다. 현실은 가혹하게도, 인간이 바라는 대로 흘러가 주지 않는다.


이 진리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경고! 1번 구속장치가 해제되었습니다."


천사가 깨어난 것과 동시에 지하 공간 전체에 사이렌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2.


 


오르비스, 지구에는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세계.


사건은 한여름 밤, 외딴 무인도에 있는 해변가에서 일어났다.


거울에서 빛이 무서운 기세로 쏟아져 나온다.


빛은 어둠이 내려앉은 해변을 한낮처럼 환하게 밝힐 정도로 강했다.


“이, 이게 뭐야!”


방금까지만 해도 일행을 압도하던 안젤리카는 비명을 질렀다. 이제 소녀는 그림자도 태워버릴 만큼 강렬한 빛을 막기에 급급했다.


그 반동으로 거울이 흔들리자 일행은 온 힘을 다해 거울을 붙잡았다.


“꼭 붙잡고 있으라용!”


“힘 쓰는 건 자신 있어!”


작은 용인의 말에 유피네가 호기롭게 대답한다.


“용, 용서 못해!”


간신히 버티던 안젤리카는 능력을 사용해 일행을 공격하려 했지만 빛이 점차 강해지는 탓에 실패했다.


“그, 그만 왔던 곳으로 돌아가 주세요!”


“가짜 안젤리카! 빨리 너네 집으로 돌아가!”


소녀는 점점 빛에 떠밀리기 시작했다. 시야가 흐릿해진다.


“마지막. 마지막 주문만 있으면…”


소녀는 쓰러져 있는 분홍 머리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염원이 눈 앞에 있었다.


“하나가…”


 


하나가 되자 안젤리카…


 


거울에서 쏟아져 나온 빛의 격류는 소녀를 집어삼키고 난 다음 폭발하듯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폭발이 끝난 밤의 해변은 평소와 같이 조용했다. 귀를 기울이자 파도가 철썩 하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온다.


방금까지 이곳을 가득 채웠던 나른하고 불쾌한 기운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나 이 방법이 실패했을까 봐 일행은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방금까지 소녀가 있던 곳은 이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르비스에서 소녀의 존재가 사라진 순간.


소녀와 놀라울 정도로 닮은 소녀가 지구에 있는 연구소에서 의식을 되찾았다.


 


'…안젤루스.'


점점 선명해지는 의식 속에서 소녀는 눈을 떴다.


어두운 공간, 사람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다.


자신의 앞에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은 남녀 한 쌍이 어색한 자세 그대로 굳어있었다.


몸을 움직이려 하자 불쾌한 느낌과 함께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눈을 들자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장치들이 보였다.


 


'실패했군요.'


‘천사’가 능력을 발휘하자 구속장치가 끊어지기 시작했다.


눈앞에 있던 두 인간들이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한다.


무익한 움직임이다. 그 누구도 예정된 심판을 피할 수는 없다.


경고음이 공간 전체에 울려 퍼졌다.


“경고! 1번 구속장치가 해제되었습니다.”


 


태초의 어둠에서 갑작스럽게 빛이 나타난 것처럼 소녀의 의식이 돌아온 것도 갑작스러웠다.


하지만 이 모든 사건은 우연에 의해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별들이 정해진 길을 따라 하늘을 도는 것과 같이 이 일들은 모두 운명의 정해진 궤도 안에서 일어났다.


경고음이 다시금 울려 퍼졌다.


“경고! 2번 구속장치가 해제되었습니다.”


 


소녀가 깨어난 것도 그림자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태초부터 모든 사건들이 운명 안에서 정해져 있었다.


그림자가 실패할 것도, 소녀가 깨어날 것도.


또한 소녀를 통해서 예정되었던 심판이 시작될 것도.


'그래서 제가 깨어난 거겠죠?'


'천사' 는 속으로 되뇌었다.


 


“경고! 모든 구속장치가 해제되었습니다!”


마지막 경고음이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마지막 구속장치가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동시에 엄청난 굉음과 함께 장치를 감싸는 유리관이 산산조각 났다.


천사의 후광에 반사되어 빛나는 유리 조각의 비가 땅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천사가 구속장치를 벗어났다.


“천사가 깨어났다! 경비팀! 긴급 상황이다!”


사이렌이 시끄럽게 울리는 가운데 지하 공간은 혼란에 빠졌다.


연구원들이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는 동안 경비팀은 천사를 제압하기 위해 한 곳으로 모였다.


자유를 얻은 소녀가 땅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러자 무수한 수의 총구가 소녀를 겨누었다.


“사살하라!”


명령이 내려진 것과 동시에 수많은 총구에서 불이 뿜어져 나온다.


 


‘천사’의 눈동자는 새벽의 서리처럼 차갑게 반짝였다.


예정된 심판이 시작된 이상, 이들에게 베풀어질 자비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그것이 창조주의 의지. 동시에 소녀의 의지였다.


이제, 인간의 운명을 시험할 때가 되었다.


 


 


3.


 


뒤에서 비명소리와 온갖 끔찍한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온다.


신체의 일부가 잘려나가는 소리, 목이 졸리는 소리, 비명, 단말마 전부 사람이 죽어가면서 내는 수많은 소리들.


사람이 죽어가면서 낼 수 있는 소리가 이렇게나 많았을까.


연구원은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잠깐 돌아본 순간 누군가의 몸이 반으로 갈라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이후로 연구원은 오로지 도망치는 것에만 집중했다.


사람이 맞이할 수 있는 죽음의 가짓수는 수백, 수천이고 그만큼 죽음은 사람과 가까이 있었다.


그동안 외면해오던 사실이 연구원을 짓눌렀다.


눈앞에 한 연구원이 주저앉아 있다. 그 연구원은 삶을 포기한 모습이었다.  초점이 없는 동공을 하늘로 향한 채 죽음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도 저렇게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연구원에게는  닥쳐오는 죽음에게서 굴복하지 않게 하는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손끝에서 느껴지는 따스함.


연구원은 후배의 손을 잡고 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사람의 온기가 이렇게나 따스했을까? 싸늘한 죽음이 손을 뻗어 눈앞을 어둠으로 가리는 가운데 이 온기는 유일한 불빛이었다. 이 온기는 꺼져가던 연구원의 삶에 대한 의지에 불을 붙였다.


참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직접 보고 있지 않아서 알 수 없었다. 상상을 괴이하게 증폭시키는 소리는 연구원을 괴롭히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소리가 멎었다.


무거운 침묵이 깔린 가운데 가끔 들리는 외로운 발소리만 울려 퍼진다.


드디어 문 앞에 도착했다.


목까지 차오른 숨을 헐떡이면서도 살아남았다는 희열이 가득했다. 결국 둘은 죽음을 피한 것이다.


"자. 어서 빠져나가..."


연구원은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곳에 후배의 모습은 없었다.


온기가 느껴지던 곳에는 신체의 일부만이 자신의 손에 애처롭게 매달려 있다.


연구원은 비명을 지르는 동시에 그것을 손에서 놓아 버렸다.


그러자 손에서 떨어진 신체의 일부였던 것이 바닥을 굴러다닌다.


그 너머로 펼쳐진 끔찍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펼쳐진 광경은 빨강. 새어 나온 생명이 빈틈없이 땅과 벽을 물들였다.


살아있는 생명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문으로 달려갔다.


미친듯이 문을 잡아당겼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젠장할! 열려, 열리라고!”


급박한 상황 속에서 남자의 목소리는 절박함을 넘어 절망으로 치달았다.


손잡이를 흔들어 보고 발로도 문을 걷어차 봤다.


하지만 문은 연구원을 비웃는 것처럼 계속해서 굳게 닫혀 있었다.


연구원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심장이 끊어질 것처럼 쿵쾅거린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영원처럼 길고도 찰나처럼 짧았다.


뒤에서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이여.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세요.”


본래는 축복을 노래해야 할, 천상의 화음을 연주하는 목소리가. 섬뜩한 공포가 남자의 등골을 쓸어 내렸다.


남자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천사’가 있었다.


수도 없이 살육을 저질렀음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 그래서일까? 연구원은 지금 이 상황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천사’는 자신을 없앨 것이다.


그것도 무참하게, 다른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연구원은 천사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애원했다.


“제발…제발 살려줘.”


하지만 '천사'의 푸른 눈동자에는 그 어떤 연민이나 동정도 들어있지 않았다.


“어떤 문도 당신들에게는 열리지 않을 거에요. 절대로.”


천사는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다.


연구원은 죽음을 직감했다. 몸에 힘이 풀린다.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무언가를 베는 소리가 들렸다.


피가 바닥에 흩뿌려 지고 무언가 바닥에 툭 부딪힌 다음 잠깐 동안 바닥을 굴러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리는 잠잠해졌다.




“제가, 허락하지 않으니까요.”


천사는 중얼거렸다. 이제는 들을 사람이 없는 독백이었다.


죽음으로 가득한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소녀는 문으로 향했다.


소녀의 손짓 한 번에 문은 고장난 적이 없던 것처럼 부드럽게 열렸다.


소녀는 문을 지나 바깥으로 나갔다.


창조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예정된 심판을 내리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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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14 최종수정

그림을 제공해주신 '사슴이시킨다'님 감사합니다.


드디어 '열쇠'를 각색한 팬픽을 마쳤습니다.

팬픽을 쓰다 보니 에픽 스토리를 까지 못하게 되네요.

...할 말이 없습니다.

재미는 없어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슴님.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팬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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